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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하나
 한공주(스포)   cinq.
조회: 2242 , 2015-09-20 21:54


(한공주를 보지 않으신 분이라면,
스포가 살짝 있을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시는 데는 문제가 없을 정도의 정보지만
오롯이 감상하는 것을 원하신다면
읽지 않으시는 편이 나을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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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조 모임에서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하기로 해서,
어제 동네 언니와 함께 한공주를 보았다.
워낙 익히 들어왔던 사건이고, 영화인 터라
별로 감정적인 동요는 없었다.

생각보다 훨씬 덜 자극적이라는 느낌.
이야기 자체는 잔인하지만,
영상적으로 잔혹하게 표현되지는 않은 듯 했다.
하도 사람들이 장면들이 잔인하다고 해서,
겁을 먹었던 터라
훨씬 더 안정감 있게 봤던 것 같다.

물론 이야기 자체는 잔혹했다.


각설하고,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주인공인 공주가,
수영을 배운 이유였다.

극 초반부터 후반까지
왜 이렇게 수영을 열심히 할까, 
했었는데.


'다시 시작하고 싶어질 수 있잖아.'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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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자신도 죽을 수도 있음을 직감했던 것이다.
그 마음이 너무나 공감이 됐다.
나도 늘 생각했었다.
나는 지금 죽을 생각은 없지만
언젠가 죽을 수도 있다고.

그리고 걱정했다.
그런데 죽기 전에 후회하면 어떡하지.
건물 옥상에서 몸을 던졌는데
떨어지는 중에 다시 살고 싶어지면 어떡할까.
물에 빠졌는데,
다시 살고 싶어지면?
목을 맸는데,
죽고 싶지 않아지면?
얼마나 끔찍할까.

그래서 죽는다면
생각없이 죽을 수 있는 방법을 택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게 있을까 싶지만-
어쨌든 내게 무서웠던 건 
죽는 것 자체보다도
죽음으로 향해가는 되돌아 올 수 없는 길에서
내가 혹여 다시 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게 가장 지옥일테니까.


공주는 그래서 수영을 배웠던 것이다.
친구 화옥이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언젠가 그렇게 몸을 던질 수도 있음을 직감하고-
다시 살고 싶어질 그 순간을 위해
수영을 배운다.
헤엄치기 위해.


.
.

나는 성폭력 관련 영화나 수기를 보고 잘 울지 않는다.
이미 익숙한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많이 울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7번 방의 선물을 보고는 오열을 하고
국가대표를 보면서도 엉엉 울고,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보면서 목이 메지만
이상하게도 성폭력 장면을 보면 담담하다.

얼마 전에 잔인한 나의 홈, 이라는 
친족성폭력 다큐멘터리를 봤을 떄도
별로 감정 동요가 없었다.

역시 익숙하거나
혹은 방어기제일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한공주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잘 봤다.
보고 나서 너무 푹 꺼질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언니랑 같이 봐서 그런 일도 없었다.

.
.


얼마 전에 아는 오빠에게 성폭행 당한 적이 있다고 슬쩍 말했는데
역시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
이제 좀 분명해졌다.

나는 여자인 친구에게는 말할 수록 편해지고
남자인 친구에게는 말할 수록 불편해진다.
그러니까 여자와 깊은 친구가 되고 싶으면 말을 하고
남자와 친해지고 싶으면 말 하지 말자.

비겁하다거나 피한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나에 대해서 모든 걸 다 이야기하고 다닐 필요는 없는 거니까.

사실 그 오빠가 물어봐서 대답한 거긴 하지만.
어쨌든 적당히 둘러대는 방법도 있으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정말 친해지는 사람이 있으면 그 때 그 사람에게 말해도 좋다.
괜히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말하면
불편해지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