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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순전히, 운이 좋았다.   생의 한가운데
조회: 187 , 2018-03-11 00:29
생각해보면 어릴적 나와 내 여동생들은 정말 자유롭게 골목골목을 오가며 놀았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길가, 인적이 드문 한낮의 골목도 아무렇지 않게 혼자서, 또는 셋이서 다녔다.
학교가 끝나고 혼자서 귀가하던 길, 보물찾기나 숨바꼭질을 한다며 숨어들었던 길모퉁이...

지금 나이가 다 들고 이만큼 커서 돌이켜보니 우리는 지금까지 참 운이 좋았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아무 생각없이 오가던 그 시간 그 길 끝에서 
누군가를 마주쳤더라면,
그 누군가가 끔찍한 범죄를 일으켰더라면..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공포스럽고 그때의 우리가 참으로 순진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물론 운이 무척 좋았던 나도 어렸을때 몇 번의 성폭력을 당했다.
초등학교 저학년때 다니던 피아노학원에서 셔틀버스기사가 항상 여자아이들에게 키스를 하고 다녔다.(입술을 갖다대는 정도가 아니라 혀까지 넣었기 때문에 뽀뽀가 아니라 키스였다.)
나도 예외에 들지는 않았다. 
싫은데 억지로 입을 갖다대는게 싫어 여자선생님들에게 얘기했더니 그냥 장난치는거라고 넘겼다.

초등학교 고학년때에는 인적드문 골목에서 20대 초반쯤 돼보이는 남자를 마주쳤는데
그가 옆으로 지나가는 내 몸쪽으로 손을 쭉 뻗더니 가슴에 손을 갖다댔다.
그리고는 내 뒷통수에 대고 "몇학년이야?"하고 물었다.
순간 얼어서 그냥 얼버무리고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와 가족에게 얘기했다.
고모는 난리를 쳤고 엄마는 그냥 조용히 넘겼다. 
나는 그게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무언가 나쁜일을 당했다는 생각에 혼자서 울었다.

또 한번은 내가 6학년때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하는 날이었는데
병원에서 마취를 하기 전에 내 옷을 다 벗기고 침대에 그냥 눕혀놓았다.
수술실에 있던 젊은 남자 레지던트들이 모여들어 내 온몸을 빤히 훑어보기 시작했는데
그제서야 할아버지 의사가 내 몸을 얇은 이불로 덮어주었고 나는 곧 잠에 들었다.

고등학생 때는 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만원버스에서 남학생이 내 뒤에 내내 바짝 붙어있었는데
내 엉덩이에 닿는것이 책가방일거라고 생각했었지만 버스에서 내리려고 보니.
그 뒤는 뭐, 너무 뻔한 레퍼토리.

그 밖에도 낯선 아저씨가 내 동생 온몸을 손으로 더듬고 만지던걸 보았던 충격적인 기억이나,
6학년때 그 병원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들, 여전히 때때로 겪는 에피소드들도 있지만
이정도 겪은 것으로는 보통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나도 내 동생들도, 그리고 친구나 언니들도.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이정도 겪은 나는 순전히, 운이 좋았다고.



그리고 나는 앞으로 '운이 좋았고, 그렇게 살았다'가 아닌
진짜 살맛나는 세상에서 '제대로 살았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그렇게 살지 못했더라도 후대들은 제발 그런 세상에서 살았으면 한다.
그리고 지금 시작된 그 변화의 물결이 제대로 파장을 일으켜 세상의 판도를 뒤집었으면 한다.
가해자가 고개를 숙이고, 피해자가 어깨를 펴는 세상. 그리고 꿈을 꾸는 세상.


#MET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