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내 선택의 합이 지금의 나인듯,
다가올 날들의 선택의 합이 미래의 내가 될 것이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막연하기에 레퍼런스를 찾아보고있다.
관심이 가는 모든 인생들을 엑셀에 정리하고 있다.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는 무엇인가.
그 하나를 제대로 하기에도 짧은 인생이라면,
내가 포기해야하는 것은 무엇인가.
만 나이 15세까지는 정말 행복했던 것 같다.
슬픈 기억도 많지만, 행복했던 기억이 훨씬 많다.
그리고 슬픈 기억들은 내가 피할 수 없는, 주어진 환경이었고,
행복했던 기억들은 모두 내 선택이었다.
그 시절에만 가질 수 있는 호기심을 마음껏 해결하며 살았다.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많은 날 밤새 게임도 하고,
이성에게 느끼는 감정을 가감없이 표현하며, 설레이는 연애감정도 마음껏 느꼈다.
그렇게 후회없이 즐거운 시간으로 채웠다.
그리고 25세까지는 썩 많이 참고 살았다.
왜 참아야하는지에 대한 마땅한 답을 아무도 내주지 않았다.
스스로 그 잠정적인 답을 찾아서 참아내긴 했으나, 그 기간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입시제도에 나를 우겨넣는 것은 배우는 즐거움보다 결과에 대한 불안함에 괴로움이 더 컸다.
세상은 너무나 불합리하게 돌아가는데, 그 불합리함을 그저 받아들이라 강요하는 사회가 싫었다.
너무나 갑갑했다. 내 몸에 맞지 않는 작은 옷을 입으면 움직일 수 없고 숨조차 쉴 수 없다.
그러니 당장은 춥더라도, 다칠 위험이 있더라도 자유롭게 숨을 쉬고 움직이려면 벗어야한다.
아무도 내 옷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스스로 만들어내려면 일단 입고있는 것을 벗어야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주어진 옷을 벗지 못하고 평생 그렇게 살아간다.
나는 내가 참아야할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하면 참을 수 없는 사람이다.
반면, 참아야할 이유가 분명하다면, 그 누구보다 잘 참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누구는 내게 인내심이 약하다 하고, 다른 누구는 내게 인내심이 강하다고 한다.
참아야할 이유도 명확히 없는 것을 참는 것은 정말 바보같은 일이다.
누가 뭐래도 본인 스스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명확한 이유'가 있을 때 참는 것만이 진정한 인내다.
시스템 내에서 인정받아보려고 노력하는 데 5년이 걸렸다. 잘 참았었다.
더 이상 참을 이유를 찾지 못하여 뛰쳐나왔다. 자유를 얻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시스템에서 벗어나 자립하는 데 5년이 걸렸다. 잘 참았다.
스스로 내 몸에 맞는 옷을 만들기 까지 춥기도 추웠고, 아프기도 아팠지만 다행히 만들었다.
토닥토닥. 고생했다.
비록 내 20대의 절반은 시스템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나머지 절반은 시스템에서 나와 자립하기 위해 노력하느라
그저 나 자신에 대해 집중하는 시간은 많이 갖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서른을 앞둔 시점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운이 좋게도 이 시스템 내에서 1인분을 확실하게 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
의사, 한의사, 변호사, 교사, 공기업 직장인, 대기업 직장인, 중소기업 직장인........
그들은 취업 준비중인 다른 친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면서도 나의 삶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건지, 애써 모른채 하는건지 알 수 없으나 난 그들에게 없는 '부담'이 있다.
내 판단으로 인해 순식간에 내 삶 뿐만아니라 직원들과 그의 가족들의 삶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
시스템 내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삶과 내 삶은 비교 자체가 불가한 이유다.
지금의 내 삶은 오롯이 내 선택이었기에 그저 불평하지 않고 살아갈뿐이다.
다만,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갈 것인가.
점점 더 규모를 키울 것인가, 종류를 늘릴 것인가. 아니면, 완전 다른 삶을 살아볼 것인가.
어떤 선택을 해야 5년 후, 10년 후에 후회하지 않을지를 고민하고 있다.
왜냐면, 이제 닥치는대로 시행착오를 할 나이는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직 20대를 떠나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휴. (땀땀)
이런 사춘기를 경험할 땐 역시 울다를 들러야한다.
당장 손이 가는대로 두드려보기도 하고,
과거에 남겼던 생각의 흔적들을 살펴보다보면,
조금 더 나다운 선택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