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빈칸,
점 하나, 선 하나 없이 고요한 종이.
나는 그게 두렵다.
두렵지 않던 때가 있었다.
오히려 그건 내 마음에 흩어져 무수히 떠도는 별들의 형태를
하나로 모아 글자로 만들어줄 무한한 가능성이었다.
산발적인 빛의 형태로 그대로 흘러가는 것들을
잡아두고 기록하는 배경이 되어주었다.
별들은 어지러이 떠돌다가 하나로 모여 어김없이 빈칸을 채우고
점에서, 선이 되어, 다시 종이 위를 어지럽혔다.
나는 그 별들을 종이 위로 모여들게 하는 일에 열정이 넘쳤다.
나의 가장 어두운 마음에서 태어난 별.
그것들은 내 마음에 갇혀있을 때면 그들끼리 외로이 이지러져갔지만
종이 위에 쓰여지고 나면 새로운 형체가 되어 끊임없이 존재했다.
그걸 지켜보는 일이 즐거웠고 어떤때는 내게 유일한 위로였다.
쓰는 일이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두렵다.
깨끗한 빈칸, 고요한 종이,
새로 시작되는 아침,
써나가야할 미래,
쓰지 않고 버려온 지난 날의 별들,
그 모든게 나를 두렵게 만든다.
예전보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