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
티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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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7 21:57
단 한순간이라도 진아를 체험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대가 바로 진아다
진아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란 없다
깨달음이란 새롭게 얻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항상 존재하고 있으며,
다만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라는 생각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깨닫지 못했다는 느낌이나 의심이 남아 있는 한,
그것들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어야 하며,
그것들은 <진아 아닌 것> 을 진아와 잘못 동일시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진아 아닌 것> 이 사라지면 진아만이 남는다
놓여 있는 물건들을 치우기만 하면 빈 공간은 그냥 나타난다
그 빈 공간은 다른 곳으로부터 가져온 것이 아니다
243.
티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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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7 20:08
진아는 곧 침묵이다
진아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생각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침묵뿐이다
진아는 어떠한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평화로움이고
완전한 고요함이며
모든 생각으로부터 벗어난 침묵이다
언어와 생각을 초월한 상태가 침묵이며
존재 그 자체가 침묵이다
어떻게 언어로써 침묵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나(에고)'라는 생각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고
오직 진아만이 존재하는 상태가 침묵이라고
성인들은 말씀하셨다
침묵만이 진실하고 완전한 앎이며
그 외의 모든 앎들은 보잘것없고 하찮은 앎에 불과하다
기억하라, 현상계의 수많은 차별상들은 진실되지 않다
그것들은 진아의 표면에 나타난 허상에 불과하다
라마나는 진아를 체험하고 있는 상태를 때로
갸나Jnana(지혜)라고도 하였다
이 상태에서는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이
나뉘어 있지 않으며
이 둘이 진아와 분리되어 있지도 않다
다시 말해 진정한 지혜, 즉 갸나란 주관적인 <아는 자>가
그것과는 분리된 어떤 객관적인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가 함께 사라진 상태에서
하나의 실재를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체험하는 것이다
이 상태에 뿌리내린 사람을 갸니Jnani(깨달은 사람, 진인)라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라마나 마하리쉬
242.
티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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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7 10:56
그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참나입니다
이 존재는 의식입니다
우리 각자의 살아 있는 본질은 이 의식입니다
그대는 진실로 무한한 순수 존재, 불멸의 참나임을 아십시오
그대는 늘 참나이며 오직 참나일 뿐입니다
"나는 하찮은 몸이다" 라는 생각을 던져 버리십시오
영원한 희열의 참나를 깊이 숙고하고 깨달으십시오
몸을 사랑하면서 참나를 알고자 하는 것은 악어를 뗏목으로 착각하여 타고 강을 건너려는 것과 같습니다
가슴에 있는 참나를 깨달은 사람만이 진리를 압니다
이원성 등을 초월하였기 때문에 그는 결코 혼란스러워지지 않습니다
참나를 아는 것은 참나로 있는 것입니다
참나가 전부입니다
참나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참나만이 실재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참나만이 세상이고, '나'이며, 신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오로지 지고의 존재가 나타난 것입니다
의식으로서의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은 없습니다
이 의식은 영원한 존재이며 유일한 존재입니다
가슴 안의 참나로 있는 것이 지고의 지혜입니다
- 불멸의 의식/ 라마나 마하리쉬
241.
티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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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8 22:40
존재가 바로 신이다
1. 마하라지; 이제, "사랑의 바탕은 필요"라고 내가 말했던 내용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지각 있는 존재에게 가장 귀중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그에게 이 세상에 있는 일체의 부를 택하겠는가, 아니면 그것이 없으면 육체는 시체에 불과해지는 '생명' 또는 '의식'(그것 위에 이미 쌓아 올려진 수천 가지 이름에 추가하여 어떤 이름을 부여해도 좋습니다)을 택하겠는가 묻는다면, 그 사람은 무엇을 택할까요? 의식이 없으면 이 세상에 있는 일체의 부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 실재는 지구상의 모든 감각 있는 존재들의 생명, 즉 온 우주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이것this-여기here-지금now, 이 생명의식이야말로 신일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다면 우주도 없고 신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현존-사랑-신 입니다.
성 요한이 "신은 사랑이다"라고 했을 때 실재의 전체성을 의식하고 그렇게 말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가 의도한 것은 그 자신이 순수한 주관성이자 본체로서 신과 서로 다르지 않다는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이며 신인 생명의식 안에 머무는 이는 신 안에 머물고 신도 그 안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2. 당신이라는 존재, 당신의 참된 자아, 당신은 그것을 사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간에 당신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움직인다. 그것을 찾고, 알고,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은 당신의 기본적 욕구이다. 이제 당신이 해야 할 것은 당신의 몸과 마음을 당신 자신에 대한 봉사에 현명하게 쓰는 것, 그것이 전부다. 당신 자신에게 진실하고 당신 자신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라.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남을 사랑하는 척하지 마라. 남들을 당신과 같은 하나로 깨닫지 못하는 한 당신은 결코 그들을 사랑할 수 없다. 다른 사람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당신을 아는 것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깨달음 없이는 그 어떤 미덕도 진짜가 아니다. 의심함 바 없이 똑같은 의식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해서 흐른다. 그리고 당신 역시 그 의식이라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될 때, 당신은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저절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자신에 대한 사랑의 깊이와 충만을 깨닫게 될 때, 모든 살아 있는 존재와 전 우주는 당신의 애정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이라도 당신과 분리해서 보게 되면, 당신은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결코 그것을 사랑할 수 없다. 멀리함은 공포를 낳고, 공포는 멀리함을 더욱 깊게 만든다. 그건 정말 악순환이다. 오직 자아를 깨달음, 이것만이 그것을 타파할 수 있다. 그것을 위해 굳세게 매진하라.
한번은 한 유럽인이 다음과 같이 마하라지에게 물었다.
방문자: 계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을 사랑하라' 입니다. 하지만 저는 다음과 같은 말, 즉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온 정신을 다 바쳐서'라는 것 때문에 그 계율이 저를 절망시킨다고 느낍니다. 그 말은 단순히 경건한 행동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온 마음과, 영혼과 정신을 다 바쳐서'는 보이는 사랑이 사랑처럼 보여야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사랑 그 자체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어떻게 진정한 사랑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저절로인 행동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마하라지의 대답은 단순하고 아름다웠다.
마하라지: 자아의 깨달음 없이는 어떠한 미덕도 진짜가 아닙니다. 같은 의식이 모든 것 속에 흐르며 당신 역시 그 의식이라는 것을 깊게 확신할 때, 비로소 당신은 모든 것을 저절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물론 직관적인 각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240.
티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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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8 22:01
1. 개체의식은 태어난 이후로 육체와 함께하고 있는 의식의 일부분으로 간주한다. 만약 우리가 이 의식 없이 태어났다면 한 조각 먼지덩어리처럼 던져져 파괴되었을 것이다. 의식 없이는 태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마하라지는 우리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원천이 의식임을 이해하라고 말한다.
2. 그 다음에 마하라지는, 의식을 소유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전체의식이며 전체의식은 절대의 현현된 객관적 측면이며, 전체의식 안에서 수십억 인간을 포함하여 전 우주가 등장한다고 말한다. 또한 전체의 나타남은 단지 가공이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여 의식을 개인적 자산으로 간주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3. 이 상태가 명백히 이해되면 현시된 것은 덧없는 육체가 아니고, 심신구조체에 감각과 지각과 생기를 주는 의식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육체는 언젠가는 죽고 현현된 의식은 사라진다. 그리고 영원한 절대만이 존재한다.
4. 실재한다고 여기는 개별적 자아라는 것 자체가 잘못된 개념이고 다른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육체도 의식 안에서의 경험에 불과하여 어떤 의지를 행사할 존재가 없다는 것이 일단 이해가 된다면 무언가를 하는 어떤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깨닫는 것이 전부다. 이 깨달음으로 철저히, 그리고 완전히 충만되는 것이 해탈을 위해 필요한 전부다. 행동에 대한 자유의지를 가진 독립된 주체라는 잘못된 개념의 소멸 없이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나라는 생각'이 소멸되지 않고서는 '참나'는 나타날 수 없다. 나라는 생각이 사라지고 나면 나는 바로 나 자신이다.
5. 마하자지가 말한 것처럼 화살이 과녁에 그대로 꽂힌다면 더 이상의 의문은 있을 수 없다 . 그러나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깨달음은 지성에 의한 개념화라는 방해에 부딪혀 어려워진다. 지적인 이해는 인과관계에 바탕을 두는데, 이 인과관계란 개념화의 바탕을 이루는 일시적 이원성의 여러 특징 중의 하나다. 직관적인 이해는 원인과 결과가 하나인 전체적인 것이다.
6. 분명히 우리의 모든 과거 경험을 조심스럽게 반추해보면, 삶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에 의해 영위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꿈속의 모든 등장인물이 하는 것처럼 저절로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는 우리 삶에 있어서 결코 진정한 요소가 아님을 보여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마하라지는 묻는다.
마하라지: 음식이나 물 없이 잠도 자지 않고 얼마나 오랫동안 살 수 있겠습니까? 육체의 배설 행위 없이 얼마나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 숨 쉬지 않고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겠습니까? 잉태되었을 때 당신은 의지를 행사했습니까?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자랄 때 스스로의 의지로 성장했습니까?
마하라지가 의지적 행위란 실제로 있을 수 없다고 말할 때, 그는 분명히 어떤 의지를 행사할---어떤 행위를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거나---실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의지의 결과라고 여기는 것은 단지 저절로 일어난 연기 법칙임을 이해하길 바란다.
우리는 어떤 행위가 그 당시에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것과 일치할 때,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했다고 자랑한다. 그리고 그것을 개인적인 성취하고 여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는 분노와 슬픔과 좌절이 일어난다. 의식의 작용인 개체의식은 분명히 '속박'을 엮어내는 역할을 한다. 반야의 작용과는 무관하게 행동하려 애쓰는 거짓 자아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음이다. 오직 그러한 깨달음만이 이 삶이 끝날 때까지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삶이 그렇게 살아지는 동안은 분명히 모든 것은 '하나'라는 명확한 의식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상대적인 대극의 '다른 한쪽'이란 거짓 주체의 대상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동일한 본질의 현상적인 면으로 지각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산다는 것 자체가 자유로운 삶이다. 그 속에서는 거짓 자아의 긍정적 행위나 부정적 행위 어느 것도 가능하지 않으며, 거기에는 의지가 없다. 개인적인 의지는 없으며 모든 행위는 저절로인 것이다. 이 삶이라는 연극 또는 삶이라는 꿈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배우는 삶을 일어나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마하라지는 말하기를 이것에 대한 깨달음이 있기만 하면 모든 삶은 유희, 곧 즐거움이다.
6. 마하라지는 반복해서 자기는 어떤 개인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의식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말은 의식으로부터 생겼으며 의식을 향해 있다.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은 의식이고, 그 말의 의미가 직관적으로 이해되면 그 말은 의식으로 통합돼야만 한다. 어떤 이득을 얻을 목적으로 듣는 '자'가 있을 땐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마하라지는 경고한다. 실제로 피해야 할 것은 바로 지성의 방해다. 이전에 분명히 보았듯이 깨달아져야 하는 것은 거짓 자아의 공허함이다. 말을 듣는 것이 거짓 자아인 한, 거짓 자아와 말 자체의 뿌리인 상대성과는 상관없는 올바른 방향 제시가 가능할 수 있을까!
말은 오직 지식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질 때 깊고 미묘한 의미를 전달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결과는 대상과 스스로를 구분 짓는 거짓 자아에 의해 외부 세계의 단순한 지적 이해에 불과하게 된다.
마하라지는 말한다.
마하라지: 당신은 전체적 현상의 나툼 중 일부만을 개별적 자아로 받아들임으로써 실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실한 깨달음은 거짓 자아가 완전히 소멸할 때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