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 troi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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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오늘만 같기를. 오늘처럼 조금만 성폭행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기를. 앞으로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기를. 지금의 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기를. 과거에서 어서 풀려나기를. . . 오늘은 빨래할 생각도 들었고 방을 치워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살을 빼야겠다는 생각 옷을 사야겠다는 생각 계획을 세워야겠다는 생각 이런 저런 생각이 다 들었다. 이런 생각들이 든다는 게 참 기쁘다. 그리고 작은 소망이 생겼다. 내가 이따금 떠올리곤 하는 작은 상상. . . 볕이 잘 드는 나만의 방이 하나 있는데, 연구실이나 교수실쯤 되는 것 같다. 거기에는 온갖 성폭행과 근친상간에 대한 연구 자료들이 모여 있고 나는 거기서 나에 대해서 연구하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을 돕는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내 연구실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편안한 마음으로 아무것도 속이지 않고 나는 완전히 나로서 그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정말 행복할 것 같다. . . 그런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오늘 하루는 가뿐하게 보낸 것 같다. 오늘만 같기를. 오늘처럼 가족들과 거실에 앉아서 작은 농담에도 웃을 수 있는. 길을 걷는 동안 내가 본 풍경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를. 지나간 것들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건 오로지 내 머릿속에 남는 것은 내 인생이 비참하다는 생각 뿐인 것은 너무나 슬프다. 오늘 하루가 다 기억날 수 있기를. 무엇을 먹었고 누구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옆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바깥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 . 요즘 친구들은 무얼 하면서 사는지 이따금 궁금해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전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노트북은 언제 수리할 지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살은 언제 뺄지 아이라이너는 언제 살지 MT에는 뭘 입고 갈지 어떤 친구들을 만나게 될 지 이런 것들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 하지만 내 머릿속엔 온통 내가 겪은 일들 생각 뿐이다. 딱 세 글자. '성폭행' 하루 종일. 그게 너무너무 슬프다. 얼른 얼른 모든 것을 털어 내고 사소한 것들을 고민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 .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누구지?' 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문이 열리거나 쿵, 하는 큰 소리가 들리면 '어디로 도망가지?' 하는 생각부터 든다. 아니면 '어디에 숨지?' 라든지. '어떻게 하면 최대한 늦게 들킬까.' '밖으로 도망가면 제일 먼저 어디로 들어갈까' 뭐 이런 생각들을 한 3초만에 시나리오를 짜는 것 같다. 일단 베란다 벽장 속에 숨고 그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가 내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다른 방을 찾아보는 사이에 우리집은 그리 높지 않으니까 베란다로 빠져나가서 전속력으로 달려 내려가 시내에 있는 파출소로 가기. 대충 뭐 이런 시나리오. 최악의 상황에는 어떻게 하면 그에게 들키기 전에 부엌에 있는 칼을 집어들 수 있을 지 동선을 짜본다. 정 안 되면 베란다 문을 잠그고 내 방문도 잠근다. 그리고 최대한 버틴다. 그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재빠르게 이런 생각을 한다, 아직은. 언젠가는 이런 생각 대신 '엄마가 왔나?' '동생이 왔나?' '할머니가 왔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되겠지. 그리고 '오늘은 어떤 맛있는 걸 사왔을까나' 라는 가벼운 기대까지도:) . .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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