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그런 일이 있었으면 어때. 매몰 비용이라 치면 되지.
라고 이야기할 자격이 생겼다. 회피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무게를 모두 짊어지면서 그 무게 전부를 매몰 비용으로 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고소도 하지 않고 엄마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묻으려' 했기 때문에 내 무의식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건 '축소'이기 때문이며 곧 '억울'하게 묻히는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축소하지도 않고 회피하지도 않을 것이다. 정면으로 맞바라보면서 모든 것을 직시하고 짊어질 것이다.
그럴 수 있다. 고소를 앞두고 있을 수도 있고 7살 때부터 내가 성폭행 당한다는 걸 알았던 엄마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할 수도 있다.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으며, 감당하면 그만이다.
누구는 이런 일따위는 겪지도 않고 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나보다 더 한 일을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있기도 하다.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란 사람보다는 불행하지만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들하고는 비슷하고 지금 바깥에서 노숙을 하거나 구걸하는 사람과는 기준을 과거에 두느냐 현재에 두느냐에 따라 비등비등하고
태풍을 겪은 필리핀 사람들보다는 낫고 지금도 전쟁을 겪고 있거나 굶어 죽어가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낫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내가 짊어질 모든 것들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받아들이면 홀가분하고 힘이 나는 반면,
'있을 수 없는 일' 이라고 규정 짓는 순간 놀랍게도 그 무게는 천근만근이 되어 나를 짓누른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나는 달라질 수 있다.
. .
모든 것을 직면하되 매몰비용이라고 칠 수 있을 것 같다. 나 자신과 약속했으니까. 아무것도 축소하지 않기로, 아무것도 피하지 않기로.
나만은 내 편이 되기로.
그러면 다른 사람이 내 편을 들든 말든 상관 없을 것 같다는 결론까지도 내릴 수 있게 된다.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까, 나를 비난하거나 얕잡아 보지는 않을까 차별받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내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사람들과 쉽게 가까워지지 못할 수 있지만
내가 내 편이라면 나는 당당할 수 있다.
'성폭행을 당했는데, 이런 나라도 괜찮겠니?' 가 아니라,
'난 성폭행을 당한 아이야. 안녕?' 이라고 인사를 건넬 수 있다. 내가 양해받아야 하는 부분이 아니다. 이해받고 배려 받았으면 받았지, 죄책감 가질 부분도, 움츠러들 부분도 아니다.
내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 나의 일부분이고 나의 특성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 .
자격, 무의식이 드디어 나를 믿는다. 믿고, 나를 일상 속으로 돌려보내준다. 자신이 나를 붙잡고 있지 않아도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을 놓는다.
이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
숨을 편하게 쉬고 눈을 명료하게 뜨면서 살 수 있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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