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판 났다는   trois.
  hit : 3563 , 2013-11-24 11:08 (일)


원래 사람들은 자신이 힘든 걸 숨기는 데 능력이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특출난 걸까.
물론 나는 지금 엄청나게 불행하지는 않다.
행복하지 못할 것은 없지만,
적어도 고군분투 중이다.




어제 동생과 데이트를 나왔다.
같이 보쌈도 먹고 영화도 보고 찜질방에도 갔다.
동생이랑 이렇게 둘이 놀아본 것은,
아주 오랜만인 것 같다.
작년에 같이 태백에 갔던 것 이후로.

아무튼, 굉장히 좋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보쌈을 먹으면서 요즘 기분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아주 편안하다고 했다.

친구들이랑 축구를 하고 들어와서
씻고 누워 있으면,
참 편안하다고.

대학 때문에 머리가 좀 복잡하기는 하지만.


엄마는 좀 불행해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누나는 행복해보인다고.
제일 살 판 난 것 같다고.



또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을 날려주셨다.
뭐, 물론 화는 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포커페이스인가,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분명 내 머릿 속에는 성폭력에 관련된 생각 뿐이고
다음 달에는 고소를 앞두고 있는데,

우리 집에서 내가 제일 행복해보인다는 소리를 듣는 걸 보면.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말 행복한 것일 수도 있다.


누나는 대학 생활도 신나게 하고
외국도 다녀오고,
그러는 걸 보면 행복한 것 같다고, 그렇지 않느냐고.
그래서 말해주었다.

물론 그런 것들을 할 때는 행복하다.
하지만 마냥 살판 난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은 내가 살기 위해 하는 노력들이다.
엄마는 나만 살판났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건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라고.
차분하게.



그리고 이야기했다.
다음 달에 아빠를 고소할 거라고.
조심스럽게,
동생은 예상했다는 듯한 반응이었고,
약간은 어이없는 듯 웃었지만,

힘내라고 해줬다.
자신은 지금이 아주 편해서
복잡한 일에 얽히고 싶지 않지만,
자신이 정말로 필요하다면 가서 증언해주겠다고.


의외로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누나가 힘들어하는 줄 몰랐다고, 말했다.


나는 이해한다고 했다.
내가 겉으로 그런 걸 티 안 내는 데 도가 터서,
몰랐을 수도 있다고.
내가 한창 강간을 당하던 중에도
나에게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공부도 잘 했고,
학교 생활에도 충실한 모범생이었으니까.
장래가 유망하다는.

그러니 누가 오늘 아침에 집에서 강간을 당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내가 말을 해야 안다,
엄마에게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로 해야겠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라는 공격은
상대의 방어만을 부를 뿐이다.

그냥 덤덤하게 내 감정, 내 느낌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

또 하나의 꿈이 점점 이뤄져가고 있다.
가족들과 나의 성폭행 경험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는.

그 첫걸음을 내디뎠다.
동생과 이 주제로 대화를 해본 건 처음이다.
처음치고는 아주 괜찮았던 것 같다.



엄마한테 이야기할 때는
조금 더 공을 들여야할 것 같다.



'한 가지만 약속해줘, 내 이야기를 듣고, 제발 이 두 마디만은 절대 하지 말아줘.
첫 번째, 난 몰라 니가 알아서 해.
두 번째, 징그러우니까 그만 얘기해.

이 두 마디는 내가 엄마한테 들은 말 중에 가장 상처 받은 말들이야.
그러니까 부탁할게. 절대 하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아빠를 고소할 거야.
엄마가 처음에 그 얘기를 했을 때는, 무섭고, 준비가 안 됐었어.
친족성폭력 고소율은 실제로 5%가 안 된대.
고소를 못 한다는 거야, 무서워서. 나도 그랬어.
하지만 이제는 준비가 된 것 같아.

당연히 고소해야 하는 일이야.
이제와서 왜, 그래도 아빤데,
이런 말 다 필요 없이
아빠가 나를 성폭행 했고, 나는 당했고,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도 아주아주 힘들어.

그건 엄연히 아빠가 잘못한 거고,
법으로 강하게 처벌받도록 규정되어 있는 거기 때문에
나는 신고할 거야.

아빠는 벌을 받아야 마땅하니까.

엄마의 도움이 필요해.
증거가 남아 있지 않아서,
진술과 증언이 가장 중요하대.

엄마가 경찰에 가서 증언을 해줘야 해.
꼭 해줬으면 좋겠어.
지금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엄마밖에 없고,
내가 믿을 사람도 엄마밖에 없어.

물론 고소를 하고 경찰에 가서 증언을 하고,
하는 과정들이 쉽지는 않을 거야.
복잡하고 스트레스 받는 과정들이 몇 개월 동안 이어질 테지만,

나를, 엄마 딸을, 도와줬으면 좋겠어.
이건 나한테 굉장히 중요한 일이야.

고소하는 게 뭐가 중요하냐,
그냥 잊고 살면 그만 아니냐,
덮어라,
고소하면 떡이 나오냐,


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나한테는 정말 중요해.
정말 하고 싶고, 아빠가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나는 정말 힘들었고, 정말 힘들기 때문이야.


다음 달에 고소할 예정이야.
아빠한테는 절대 이야기하지 말고.'



.
.


점점 더 내 인생의 진실들이 무대 위로 당당하게 올라오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한 발짝, 한 발짝씩 그 무대에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다.
스포트라이트 안에 함께 서는 순간,
눈부시게 빛나길!


달밤의 라일락  13.11.24 이글의 답글달기

너무 아름답고 강한 모습! 정말 훌륭한 여성으로 세상에서 당당히 빛날거에요!

李하나  13.11.29 이글의 답글달기

너무나 감사한 말씀. 댓글 전부가 마치 제 앞길을 환하게 비춰주는 것 같아요♡

정은빈  13.11.25 이글의 답글달기

저는 하나씨가 정말 멋있고 용기있는 사람이라 생각해요 항상 기도하고 응원하겠습니다!

李하나  13.11.29 이글의 답글달기

감사해요, 저 역시 은빈님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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