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   trois.
  hit : 3159 , 2013-12-22 01:06 (일)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다.
'공상'을 시작한 것은.

잠을 자기 위해 침대 위에 누우면
그 때부터 나만의 세상이 펼쳐졌다.
해리 포터 속의 주인공이 되어보기도 하고,
만화 속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의 인물이 되기도 했다.

머릿 속으로만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누워서 직접 말도 하고,
팔다리도 움직이면서,
그렇게 나는 다른 인물이 되어 
다른 상황을 만나는 공상을 즐겼다.

그런 공상은 으레 다음 날 이야기가 되어 
글로 써지곤 했다.
그렇게 소설을 쓰는 게 취미였고,
나는 소설로 쓸 공상을 하기 위해 밤을 기다리곤 했다.

나는 머리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소설은 쓰지 않았다.
낮에, 컴퓨터에 앉아서,
줄거리를 떠올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밤에 내가 직접 공상 속에서 겪은 일들만 소설로 써냈다.
그래야 훨씬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머리로 구상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그 속의 한 인물이 되어서
직접 이야기해보고 느껴본 이야기들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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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취미는 고등학생 때까지 이어졌다.
이 즈음에는 밤 뿐만 아니라 낮에도 이런 공상을 했다.
혼자 있을 때나, 
혼자 길을 걸을 때
이런 공상을 많이 했다.

나는 지금도 공상을 많이 한다.
지하철을 타고 갈 때나,
혼자 집에 있을 때,
밤에 자려고 누웠을 때,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도
나는 공상을 많이 한다.
공상의 주제는 대개 몇 가지 종류로 나뉜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되거나 대단한 일을 한다든지
아니면 로맨틱한 일이 벌어지는 것
혹은 아주 안 좋은 일이 발생하는 공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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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선로로 아이가 떨어지는 상황,
내가 아이를 안고 같이 선로로 떨어진다.
곧바로 지하철이 그 위를 덮친다.

사람들은 모두가 지하철이 아이와 나를 쳤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아이를 안고 선로 안 쪽 공간으로 피신한 상황.
그리고 나는 겁에 질린 아이를 의연하게 달래고, 
지하철이 모두 지나가고 나서
아이를 데리고 그 공간에서 나온다.

아이는 무사히 구조되고
아이의 엄마는 내게 고맙다고 말하고
사람들은 이 동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며
나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인터뷰 신청도 들어오지만 나는 이를 거절하고
유유히 사라진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내가 하는 공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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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
교수님도 함께 계신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뒤에서 '이하나'하고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순간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오른손으로는 슬며시 술병을 가까이로 끌어당긴다.
느릿느릿 뒤를 돌아보니 
아빠가 나를 찾아 학교까지 온 것이다.

나는 아빠를 살핀다.
어떤 걸음걸이로 걸어오고 있는지,
차분하게 그저 나에게 가까이 오려고 걸어오고 있는 건지
아니면 곧 나에게 달려들기 위해 걸어오고 있는 건지
발걸음과 손을 살핀다.

그리고 그 발걸음이 곧 나에게 돌진해오는 것임을 깨닫고 
술병의 몸통이 위로 향하게 술병을 잡고 경계 태세를 취한다.
앞에 있던 친구들과 교수님은 
아빠가 나타난 것만으로 본능적으로 경계하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본다.


요즘 아주 자주 하는 공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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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주 비슷한 생각과 가치관, 심리상태, 그리고 성장환경을 가진 
남자 아이가 있다.
후배인데,
그 아이에게 약간은 호감이 가기 때문에
공상 속에 이 아이를 등장시킨다.

이 아이와 내가 가까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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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상을 자주 하는 편이고,
그 공상의 내용은 늘 비슷하다.
내가 영웅화되는 것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는 것,
아주 극단적이고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것.


무지 착한 일을 해서 추앙 받는 공상도 많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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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을 좀 파악해봐야겠다.
공상을 한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원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뭘 원하는 지 공상을 보면서 알아봐야겠다.

그리고 계속해서 공상을 통해서 대리만족을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행동함으로써 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솔나무  13.12.22 이글의 답글달기

저도 공상을 되게 많이 하는데 정말 공감되네요 근데 공상을 파악하고 현실에서 실천할 수있는 일을 찾아본다니 정말 그런 생각은 해본적도 없었어요. 일기 잘읽었어요

李하나  13.12.26 이글의 답글달기

그렇죠? 오늘도 아침 댓바람부터 이것저것 공상을 했답니다. 공상 관찰 일지 좀 써야겠어요ㅎㅎ우리 함께 공상을 현실화해보아용!

없음  14.01.07 이글의 답글달기

님이 쓴 소설 읽어보고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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