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는 눈 │ 치유일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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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국사 선생님은 참 좋은 분이셨다. 가르쳐야 하는 내용은 정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역사를 읽는 눈과 균형잡힌 역사관을 가르쳐주시려고 했던 것 같다. 덕분에 나는 교과서가 하는 말만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중학생 때까지는 교과서가 '진리'라고 생각했다. 교과서에 나온 것은 다 사실이며, 내가 반박할 수 없는 내용이라고. 하지만 그 국사 선생님께서는 교과서를 설명해주시다가도 이 부분에 대해서 다른 교과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말씀해주시기도 하시고, 자신의 견해도 말씀해주시면서 교과서의 문장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또한 역사는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록'이라는 깨달음도 주셨다. 그 전까지 내가 생각하는 역사는 역사책에 기록된 것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역사 책에 나오는 것은 1%에 대한 이야기다. 나머지 99%도 분명히 역사 속에 존재했고, 그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고. 일례로, 독립운동에 대해서 배울 때, 교과서에서는 적극적인 독립운동들에 대해서 소개했다. 그래서 나는 교과서를 볼 때마다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열심히 독립운동을 했다고 생각했고, 이렇게 열심히 독립운동을 했는데 어째서 일본이 전쟁에서 패할 때까지 독립할 수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내 의문을 어느 정도 풀어주었다. 교과서에 나온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 뒤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산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다고. 정말로 맞는 말이었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식민지배에 순응하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독립운동을 했다고 생각했을까? 지금만 보더라도,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유지되고 있는 건데. 사람 사는 세상은 언제나 비슷한데.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역사를 볼 때는 그 당시의 맥락에서 보아야만 한다고도 하셨었다. 지금의 시각에서 당시의 사건들이나 상황들을 판단하기 전에 그 때 그 장소, 그 시간, 그 자리, 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예를 들어, 삼국 시대 때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통일을 이룬 것을 두고 지금의 입장에서 본다면 '외세의 힘을 빌려 통일을 한 게 정당한가?'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신라, 백제, 고구려가 한 민족이라고 여겨지지만 당시 신라에게는 고구려든 백제든 당이든 똑같이 '다른 나라'였을 뿐이라고. 지금이야 한반도가 통일이 되었지만 삼국시대에는 각기 다른 나라였기 때문에 신라의 입장에서는 모두 다른 나라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크게 수긍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얼마나 지금의 우리 입장에서 역사를 보는 것에 익숙한가. . . 당시의 맥락에서 보기. 나 자신의 역사도 그렇게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왜 13살 때 이제 곧 내 옷을 벗기려는 아버지를 밀치고 집밖으로 뛰쳐나가지 못했는가? 어떻게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하면서도 나머지 6일 동안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생활할 수 있었던 걸까? 지금의 눈으로 보면 절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은 끔찍한 상황이고, 반드시 신고해야만 하며 아버지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라고 해서 내 몸을 함부로 할 수는 없으며 그런 것은 우리 나라는 물론 대부분의 나라에서 아주 큰 죄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이것을 안다. 내가 겪었던 일이 어떤 것인지 명확히 설명할 수 있으며 그것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그래서 내가 어떤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버지가 왜 잘못한 거고 어떤 벌을 받아야만 하는 지 안다. 그러나, 그 때도 내가 알았는가? 7살 때도 내가 알았는가? 8살 때는? 9살, 10살, 11살, 12살, 13살, 14살, 15살, 16살, 17살, 18살, 19살, 20살. 나는 알았는가? 몰랐다. 나는 상황을 분명히 보지 못했다. 내가 겪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인지 잘 알 수 없었으며 어떻게 하면 좋을 지도 알 수 없었다. 왜 몰랐는 지는 모르겠다. 배운 적도 없고 누구한테 들어본 적도 없기 때문일까. 어찌되었든 나는 그렇게 살았고, 하루는 강간을 당했지만 나머지 6일 동안은 그 날에 집중해서 사는 편을 택했던 건 아닐까. 돌아올 수요일에 내가 아버지를 죽일 수 없다면 나는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았던 건 아닐까? 비겁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을 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그 때는 지금처럼 '나는 지금 성폭행을 당하고 있다'라고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아버지 이외에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맺어본 적도 없었고, 성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하거나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었다. 나는 단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책을 많이 읽는 학생이었을 뿐이다. 집에 가면 또 아버지가 나를 만질 게 뻔하지만 학교에 있을 때는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게 내가 택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지금 택한 방법, 즉 아버지에게 대항하고 아버지를 고소하는 방법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어쩌면 나는 조금 더 일찍 벗어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하다고 했다. 일어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어났고 지금은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기 때문에.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엄마에게 이야기했고 22살이 되어서야 고소할 수 있었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지금은 아버지가 나한테 했던 행동들이 무엇인지 잘 알 것 같다. 아버지는 남자와 여자가 성적으로 교감을 나누는 그런 종류의 행위들을 나에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아버지가 뭘 하는 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그저 내 가슴을 입에 물고 내 성기를 입에 물고 자기 성기를 내 질 속에 집어넣고 왔다 갔다 거리고 그러다가 혼자 마구 움직임이 빨라지다가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면서 하얀 액체를 쏟아내는.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지금에서야 나는 이것이 섹스의 과정이며 남자와 여자가 성적 만족을 위해 하는 행위라는 것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당시에는 이 새끼가 도대체 내 위에서 뭘 하는 건지 알 수도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자세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 . 그냥 빨리 그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란 적이 많았을 뿐이다. 아직까지도 내가 잘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왜 그랬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단지 나를 이해하고 싶다. 소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그 이야기를 들어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직 명확한 답은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마음을 열어놓으려고 한다. 나를 믿어보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나에게 천천히 마음을 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어떤 선택을 했었든, 나는 나를 믿고 싶다. 나는 나를 위한 결정을 했으며 어떤 부분에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비극이지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 당시의 나는 당시의 자신을 위한 선택을 했다. 지금의 내가 원망할 대상은 아닌 것이다. 나는 나를 위한 선택을 했었을 뿐. 그 때 없었던 내가 뭐라고 이제와서 그 때의 나를 욕한단 말인가. 내가 무엇을 선택했든, 나는 나를 믿는다. 그 선택을 받아들일 것이고 그것은 반드시 옳은,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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