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e of my business. │ 치유일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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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e of my business. 요즘 이 말에 꽂혔다. 한국말로 쉽게 말하면, 내 알 바 아님, 정도가 되겠다. . . 살 것인가 말 것인가, 는 내가 신경쓸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적어낸 이후로, 다른 여러가지 내 알 바 아닌 일들에 대해서 깨달았다. 첫 째로, 사람들을 만날 것인가 말 것인가. 물론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꽤나 어리석은 질문이다. 하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나는 굉장히 심각하게 이것에 대해 고민했다. 왜? 혼자서 나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서 떠올릴 때는 그다지 심각해진다거나 기분이 안 좋아지지 않는다. 혼자 앉아서 아버지와 섹스를 해야만 했던 순간들, 엄마가 내 동생에게 '니 누나는 너만 챙긴다'고 말했다는 얘기, 등등 기분이 나빠질 만한 이야기를 떠올려도 그저 그렇다. 그런데 내가 괴로운 건, 사람들을 만날 때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지 못해서 답답하다. 내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도 아니다. 나는 지금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원래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밝고 활기차고 에너지가 넘친다. 많은 사람들에게 친절할 수 있고, 인기도 많을 수 있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잘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힘이 빠져있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집중을 잘 할 수가 없으며, 사람들에게 밝게 다가가지도 못한다. 이 모든 일들은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의 맥락에서 보면 어쩌면 그리 이상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지금 한 곳에 에너지를 쓰고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가 내 에너지를 어디에 쓰고 있는지 학교 친구들에게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내가 지금 왜 빛나지 못하는 지 설명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나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너무너무 괴롭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면 괜찮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이 혼자 있을 때는 견딜만 하다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나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면 혼자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사람들을 만나지 말아볼까. 그게 답일까. 하지만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은 중학생 때부터 해왔다. 그 때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생각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나는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는 혼자 있는 편이 더 편했다. '좋았다' 가 아니라 '편했다' 그래서 중학생 때부터 나는 반 친구들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조용하고 착한 성격의 여자아이들 몇명과만 놀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음침하거나 왕따를 당한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아이들은 나를 좋아했고, 나는 인기가 많았다. 다만 내가 그 모든 것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늘 심리적으로 혼자인 상태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누가 옆에 있어도 나는 얼마든지 혼자일 수 있다. 일과 시간에는 반드시 반 친구들과 같이 있어야 하는 학창시절에는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고등학생 때도 마찬가지였다. 반 친구들은 나에게 말을 많이 걸었지만 나는 그 중 한 두 명에게만 말을 걸거나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다. 나머지 아이들에게는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해줄 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나는 혼자 지내는 것이 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혼자인 적은 없었다. 중학생 때도 마음 맞는 아이들 6명과 어울려 놀았다. 물론 그 친구들 모두와 아직까지 친하게 지내지는 않는다. 두 명과는 아예 연락도 하지 않고, 한 명은 전학을 갔고, 한 명은 이따금 연락을 하며 다른 한 명은 내가 지금 신세를 지고 있는 고맙고 소중한, 그 친구다. 고등학생 때도 기숙사 친구들과는 아주 잘 어울려 놀았다. 함께 속 이야기도 하고, 같이 먹을 것도 나눠 먹고 같이 샤워도 하고 정원에 가서 돗자리를 깔아놓고 간식을 먹으며 공부도 하고, 겨울 새벽에 이불을 가지고 나가서 함께 누워 별똥별도 보고, 시험 기간이면 밤새 같이 공부도 했다. 대학생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걸 싫어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사실 '싫어'한 적은 없었다. 단지 불편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많으냐 적으냐의 차이였을 뿐이다. 신입생 초반에는 역시 대여섯명의 친구와만 어울렸다. 하지만 후반 부에 가서는 과 친구들, 선후배들과 많이 어울렸다. 다른 과 친구들도 몇몇 있었다. 그러다가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게 지칠 떄면 그냥 몇 명만 만나기도 했다. 또 그러다가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지면 다른 학교 사람들도 만나게 되고 그랬다. 사람들 속에 있는 게 불편할 때도 있었고, 편할 때도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많을 때도 있었고, 없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늘 사람들과 함께 했다는 것이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소중한 어른들도 많이 만났고, 소중한 친구들과 동생들도 만났다. 남자들과는 잘 친구가 되지 못하는 편이긴 하지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남자 아이들도 몇몇 생겼다. 이런 내가 갑자기 사람을 끊는다고? nonsense다. 내가 고민을 하든 말든 나는 분명히 다시 사람들과 함께 지낼 것이다. 지금은 잠시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뿐이다. 자꾸 나한테 뭘 물어보기도 하고, 내가 설명해야 할 것들도 너무 많아서, 잠시 홀로 있는 게 편할 뿐. 나는 언제든지 다시 사람들과 함께 지낼 것이고, 그곳에서 행복을 얻을 것이다. . . 내가 태국에 다녀온 뒤, 다이어리에 붙여둔 메모가 있다. <행복하는 방법♡> 1.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기 - 나를 사랑하기 -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기 2.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있기 3. 내가 하고 싶은 일 하기. 내가 잘 하는 일 하기. 4.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기 : 생각 멈추기 5. 가끔씩은 힘들어주기 6. 내 인생이 언젠가 끝난다는 것을 기억하기 그곳에 있던 15박 16일 동안 깨달은 것들이다. 한 번 깨달은 것은, 깜빡할 수는 있어도 잊어버릴 수는 없다. 나는 이미 사람의 소중함을 알았고, 사랑의 소중함 역시 알았다. 비록 그것이 나에게는 무서운 일일지라도,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불안하고 누군가에게 뭔가를 바란다는 게 나로서는 매우 불편하고 익숙치 않은 일일지라도 나는 해내면서 살 것이다. 왜? 지금껏 그래왔기 때문에. 내가 앞으로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살아간다. 사람은 갑자기 변하지 않는다. 특히 생각만으로 변하지 않는다. 내가 다른 일을 겪어 또 다른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다면 모를까, 어찌되었든 나는 살 것이고, 사람을 만날 것이다. 살 것인가 말 것인가, 사람을 만날 것인가 말 것인가, 이 두 질문은 앞으로 당분간은 none of my business다. . . 그리고 또 중요한 것 하나. 나는 지금까지 내가 겪은 일, 그것이 만든 나, 그 일과 관련된 사람들에 대해서 반드시 공부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끔은 공부하지 말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부분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지만, 가끔은 '내가 여기에 너무 매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none of my business! 친족 성폭력, 내가 겪은 그 일들, 그 때 내가 겪었던 것들, 거기에 대해 내가 느꼈던 감정,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 그로 인한 상황과 과제들, 여기에 대해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내가 뭔가를 선택할 수 있다고? 아니다. 나는 어떻게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고민하는 것이 옳은 것이든 옳지 않은 것이든 상관 없다. 내가 겪은 일이고, 나에게는 엄청나게 큰 일이었기 때문에 내가 하겠다고 결심하든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든 나는 하게 될 것이다.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그 자식을 평생 떠올릴 수밖에 없듯, 나 역시도 그 경험에 대해서 평생 기억할 수밖에 없다. '성폭력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는 내 영역이 아니다. 생각이 나면 하면 되고, 생각이 안 날 땐 안 하면 된다. 찾아오면 맞아주고, 떠나가면 보내면 된다. 목이 마른 건, 몸이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땐 물을 마시면 된다. 더 이상 물을 마시고 싶지 않다면 그건 이제 충분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목은 다시 마르게 되어있다. 그러면 물을 또 마시면 된다. 언제나 목이 마르지도 않으며 언제나 목이 촉촉하지도 않다. 그건 반복된다. 나는 언제든 성폭력과 관련된 고민에 휩싸일 수 있다. 왜냐하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든 거기에 무관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충분히 고민했기 때문이다. 고민이 필요하다면 다시 고민에 빠질 것이며 충분히 고민했다면 다시 무관심해질 것이다. 나를 믿고, 나라는 조류와 파도에 몸을 맡기자.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햇살이 좋은 날이었는데, 나무 의자에 앉아 있던 내 하얀 가방 위로 무지개가 드리워졌다. '어디서 오는 무지개일까?' 라고 생각하면서 몸을 움직였는데, 무지개가 사라져버렸다. 나는 아쉬워하며 다시 몸을 돌렸고 그 때 다시 무지개가 나타났다. 내가 조심스럽게 몸을 틀자 무지개는 그 모양을 바꿨다. 버스 정류장 유리 틈 사이로 비춰들어오는 무지개였다. 무지개를 손에 비추니까 내가 마치 무지개를 만들어낸 것 같아서 사진을 찍고 싶었다. 이리 사진을 찍고 저리 사진을 찍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무지개가 움직여주지 않았다. 내가 한창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무지개가 사라져버렸다. 나는 아쉬웠지만 하는 수없이 다시 돌아 앉아 그냥 버스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내 등뒤에 있던 버스가 출발하자, 다시 무지개가 나타났다. 나는 기뻐하면서 다시 무지개를 가지고 놀았다. 내가 손을 갖다 대면 무지개는 손 위에 올라왔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의자 위에 드리워졌다. 가방을 갖다 대면 가방 위에 그려졌고, 다시 앉으면 몸 위에 겹쳐졌다. 나는 그렇게 재밌게 무지개와 놀다가, 내가 타야할 버스에 올라탔다. 자리에 앉자, 뭔가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면 참 편할 것 같다고. 방금 전 무지개랑 논 것처럼. 무지개는 참 예쁘다. 그래서 갖고 싶지만, 나는 무지개를 가질 수 없다. 무지개의 모양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도 없다. 별로 짜증은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그냥 무지개니까. 무지개는 생긴 대로 생길 뿐이다.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생긴 모양 대로 맞춰서 가지고 놀다가 거기에 두고 와버리면 된다. 내가 가지고 집에 갈 수 없음이 아쉽긴 하지만, 그 무지개는 정말 예뻤다. 무지개랑 노는 방법은 그것이다. 그냥 무지개가 무지개일 뿐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 내 것도 아니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것일 뿐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그냥 내가 볼 수 있는 아름다움만을 보고 잠시 머물며 노는 것. 집착하지 않는 것. . . 잡히지 않는 것,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내 것이 아닌 것을 잡으려, 내 마음대로 통제하려, 손에 넣으려 하지 않으면 내가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누릴 수 있다. 내가 만약 무지개가 내 마음에 맞게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버렸다면 나는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사는 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며 내가 잡거나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내가 볼 수 있는 아름다움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즐겨보는 게 어떨까. 내 아버지가 나를 자기 무릎 아래에 깔고 강간했다거나, 내가 말을 안 들으면 나를 때렸다거나, 엄마가 내가 그 이야기를 했는데도 이혼을 하지 않았다거나, 내가 그 때 도망을 가거나 아버지를 죽일 수 없었다거나, 일어났었던 모든 일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론 긴 시간에 걸쳐 나를 이해하는 작업은 필요할 것이다. 내가 앞으로 남자 친구를 쉽게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거나, 어쩌면 오랜 시간 동안 이 문제에 얽매여 있을 거라거나, 결혼을 못할지도 모른다거나, 하는 문제들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나쁘거나 불편한 점들을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고 해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만 빼면 다른 것들은 아름답지 않은가. 나는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갖고 있고, 스물 셋이다. 하늘이 내려주신 복, 이라는 이름의 뜻처럼 나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이 복으로 내려져서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다. 물론 부모는 좋지 않았고, 지금은 집에 살지도 못하고 다른 친구 집에 얹혀 살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원래 가족들보다 이 가족들이 훨씬 더 좋다. 훨씬 더 좋은 사람들이다. 소중한 사람들이다. 나는 남자친구를 사귀는 일이 힘들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아빠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는 걸 이해해줄 만한 사람을 찾는 게 지금으로서는 너무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어떤 남자가 이해해줄까? 결혼도 마찬가지다. 아빠한테 성폭행을 당한 여자, 그 아버지는 교도소에 들어가 있고, 엄마는 딸이 성폭행 당하는 걸 방치했다. 그런 여자를 어떤 집안에서 좋게 봐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꽤나 많은 것을 잃었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하지만 우주를 조금만 더 넓혀보자. 잃은 것들, 못할 까봐 두려운 것들에서 내가 해낸 것들, 할 수 있는 것들, 가능성들, 빛들에 초점을 맞춰보자. . . 내가 엿같다고 소리를 지르든, 즐겁다고 미소를 짓든 내게 주어진 인생은 똑같다. 무지개에는 짜증이 덜 나고, 인생에는 짜증이 더 많이 나는 이유는 무지개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쉽게 인정할 수 있는데 내 인생을 내가 어떻게 못한다는 건 쉽게 인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똑같다. 무지개만큼이나 내 영역 바깥의 것들이다. 일어난 일들이란 건, 타인이란 건, 상황이란 건. 나 자신까지도. 무지개와 놀았던 그 날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 내 과거, 나와 관련된 타인, 그리고 상황과 놀 수 있다면 나는 내가 누릴 수 있는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다 놀고 난 뒤엔 홀가분한 마음으로, 버스 정류장을 떠나는 버스에 올라탈 수 있을 것이고, 상쾌한 마음으로, '아름다웠고, 재미있었어' 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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