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어버이날 다음날 돌아가셨다. 그나마도 아빠의 살려는 강한 생명력이 하루를 더 보낸게 아닐까 싶다.
아빠는 대범하셨다. 재치도 있으셨다. 어떤 곳에 가든 가장 존재감이 큰 분이셨다.
그에 비해 나는 어릴 때부터 낯가림이 심해서 항상 아빠 뒤에 숨어있었다.
아빠는 어디 가서 할말 다 하고 살아야 한다고, 걱정된다고, 술만 드시면 앉혀놓고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하셨다. 나는 내가 컸으니 알아서 할거라고 소리만 질러대는 딸이였다.
아빠 장례식장에 앉아있는데,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다 와서 아빠가 얼마나 자랑했는지 모른다고 안아주었다.
낯가림이 심해서 힘들었다. 모르는 공간에 앉아있는 것도 힘들었고 내가 상처준 말이 생각나서 힘들었고 내가 아빠 병을 몰랐다는 사실이 죄책감들어 죽고 싶었다.
친척들은 장례는 무슨 장례냐며, 대충 수목원에 뿌리자고. 상복도 제일 싼걸로. 이것도 저것도 다 싼걸로 하라고 강요했다. 아빠가 어디가서 할 말 다 하라고 살으랬던 말이 떠올라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른들한테 이게 싫고, 저게 싫다고 따지고나서 떨리는 두 다리를 끌고 아빠 영정사진 앞에 돌아왔다.
앉아있으니 앞으로가 너무 걱정됐다. 이제 나를 가려줄 존재가 없겠구나, 낯선 곳도, 낯선 일들도 내가 결정해야하고, 냉정해져야 하는데 나는 고작 스물 두살이고. 언니랑 나랑 둘이 이 상황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빠 뒤에서 배운 적이 없었다. 아빠 뒤에 숨고 싶었다. 여기 잘 모르는 곳이니까 아빠랑 같이 있고 싶었다.
어른들이 어려서 니가 슬프다고 하던데, 내가 한 두살만 더 많았어도 슬픔의 무게가 달라졌을까 싶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한방울 한방울이 심장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아빠 손을 잡고 싶은데 키가 작아 햇빛때문에 아빠 손이 잘 보이지도 않던 가장 어렸을 때 기억부터 찾으려고 노력했다. 좀 더 아빠가 살아계셨을 때 같이 기억을 찾아둘 걸 싶었다.
49제 지내던 날 밤 꿈에 아빠가 찾아오셨다. 내가 자고 있던 침대 옆에서 평소처럼 지압기를 밟으며 티비에 집중하고 계셨다. 마치 돌아가시지 않은 것처럼.. 내가 벌떡 일어나서 아빠 어디냐고 아빠를 잡았는데 생전 그 느낌 그대로였다. 아빠는 마치 눈물을 꾹 참다 걸린 사람처럼 통곡하며 우셨다.
그리고 생전 말투 그대로 "아빠 우리 애기들 걱정되서 와봤어" 라고 말하시는데 태어나서 그렇게 펑펑 우시는 모습은 처음 봤다.
아빠보고 나는 언제 만나러 갈 수 있냐고 했더니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면서 안된다고, 아빠가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고 하셨다.
내가 그럼 제발 좋은곳 가라고 울면서 애원했더니 알겠다며 내 품에 안긴채로 흙처럼 부서져서 하늘로 올라갔다.
이 꿈을 꾼 이후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직도 남들 앞에서 밝은 척하고 괜찮은 척 하는게 사실 힘들다. 친구들은 내가 괜찮아 진 줄 알고 있다. 그게 저 불효녀같은 년이라고 뒤에서 안주거리가 되고, 욕을 먹어도 티 낼 자신이 없다.
혹시 내가 죽고 하늘나라로 갔을 때, 아빠보다 먼저 만난 사람들이 아 그분 딸이냐고 알아볼까봐. 닳도록 벌써 칭찬해놨을까봐.
나는 자랑스러운 딸이 되어서 가야 한다. 냉정하고, 침착하고, 할 말 다 하고 사는 딸이 되어 돌아가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다.
며칠 전에 아빠랑 식당에 가서 밥 먹는 꿈을 꿨다. 평소처럼 아빠를 대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 같아 어디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요새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누가 어떻게 했는지 내 얘기만 계속 했다. 아빠는 그냥 말없이 웃으면서 밥을 드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