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   cinq.
  hit : 2330 , 2015-01-03 01:51 (토)

오늘은 두 달 전에 들어갔던 단체에서 빠져 나왔다.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물론 그 단체에 대한 여러 가지 불만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이제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할 듯 싶어서
발을 뺀 것이었다.

회식을 하면서 이 이야기를 했는데
친한 언니가 나한테 '실망을 했다'고 얘기를 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충분히 고민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일리가 있는 말이었지만,
내가 내 이야기를 잘 전달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단체에 대한 불만만을 이야기하고
갑자기 나간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언니는 내가 고민하는 중간 단계,

즉 내가 앞으로 반성폭력 운동에 집중하고자 마음 먹은
이 단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이 단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가는 것으로 이해했을 수도 있을 듯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본다면
내 결정이 실망스러울 수 있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내 결정에 대해서 잘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어떤 결정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곤 한다.

내가 항상 가장 중요한 전제를 빼놓고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성폭력'과 관련된 일이다.

아직까지 내 결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그 부분을 설명하지 않으니,
늘 한 조각이 비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조금 오해를 하기도 하고
이해하기 힘들어하기도 한다.

나도 설명하는 게 익숙치 않아서 
그동안은 대충 설명해오고 말았는데
나이가 들 수록
책임이 커질 수록
설명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나 자신의 조각을 빈틈없이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적어도 가장 중요한 부분 정도는 
설명을 해야
논리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A이면 B이고
B이면 C이다.
따라서 A이면 C이다.

라는 삼단 논법 중에
B이면 C이다 라는 중간 명제가 하나 빠진다면 

A이면 B이고
A이면 C이다.

는 사실 뭔가 부족한 설명이다.
누구든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단체엔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그래서 나는 나갈 거야.


그러면 당연히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면 되는 거 아니야?'
라고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나의 결론은


이 단체에는 문제가 있는 것 같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성폭력과 관련된 일에 집중하고 싶기 때문에
나갈 거야.

인데.
저 중간 문장이 빠져있으니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다.



.
.

다음에 만나서 이 부분을 진중하게 설명하고 싶다.
그러고도 이해를 하지 못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실망'이라는 단어가 주는 상실감은 굉장히 큰 것 같다.
자존감에의 타격이 크고.
그동안의 나의 행적까지 불신을 심어준다.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적어도 내가 설명하지 않아서 
오해를 사지는 않도록 하고 싶다.

이해받고 싶은 사람,
이해시켜야 하는 사람에게 정도는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많이 말하는 경험을 갖고
연습도 많이 해야겠지.

그런 것들이 내가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 같다.
길지 않은 인생 동안 내가 집중할 일. 




.
.



내 단점들이 바깥으로 드러나
내가 그 부분들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는
아주 긍정적인 신호이다.

그 전에는 이런 것들을 숨기고 
완벽한 척 연기하기에 바빴으니까.

이런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늘 피하기만 했다.
인간관계로까지 스트레스를 받으면 
내가 정말 죽어버릴 것 같아서.

하지만 이제 이 정도의 스트레스쯤은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행복한 변화이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무서워하지 말고,
부딪혀보자.

나를 표현하는 것을 무서워하고 
피하면 
사람들은 나를 더욱 오해할 뿐이다.




.
.


지금도 사람들은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함께 해결하면 좋을텐데 왜 나가는 선택을 하는 걸까.
다음 주 회의에 가능하다면 내 생각을 조금 더 설명하고 싶다.

앞으로의 나의 꿈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
.

잘 설명을 못 하고 이해를 못 해줘도 어쩔 수 없지만 
어쨌든 시도하는 것 자체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말 뭐 하나 쉬운 게 없는 것 같다.
이럴 때면 감옥에 있는 아빠가 정말 미워진다.
나에게 너무 어려운 숙제를 안겼기 때문에.

어쨌든 내게 주어진 이상 내가 풀어내야 하는 숙제이다.
'표현'에의 과제.




일단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연습이 중요하겠지.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글로도 써보고
말로도 표현해보고
정리도 해보고.

그대로 이런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이야기해보고.
무엇이 잘 이해가 안 가는 지 피드백도 들어보고.

그럼으로써 
나는 성폭력 생존자로서 말하는 방법을
상대는 듣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성폭력 생존자로서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이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일상의 혁명.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을 믿는다, 나는.







신이 있다면 
겪어보고 해결하고 오라고 내게 이런 일을 경험하게 했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말도 안 되지만,
어쨌든 그 정도로 나는 당사자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어쨌든 오늘의 과제는
나 자신의 조각을 잘 설명하는 것.
앞으로 잘 고민해보자.

프러시안블루  15.01.04 이글의 답글달기

그 어떤 설명도 완전전달은 불가능한 듯.

하나양이 그렇게 결정했다면 맞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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