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여행을 다녀와서.   cinq.
  hit : 2836 , 2015-03-01 18:33 (일)


한 달 동안 터키로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1년 전, 
아는 언니와 햄버거를 먹다가 무심코 던졌던 한 마디,


'아, 터키 가고 싶다.'


우리는 터키에 가기로 약속을 했고,
약속대로 반년 뒤,
터키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비행기표를 끊고
여행 일정을 짜고,
준비물을 사고,
짐을 챙겨

비행기를 탔다.


그렇게 시작됐던 터키 여행.
지금은 꿈 같았던 한 달 동안의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있다.

신기하게도 터키에 있는 내내,
그리고 귀국해서 일주일이 지나서까지도
별로 글을 쓸 마음이 들지 않았다.

터키에 있을 때도 일기를 별로 쓰지 않았다.
한 달 내내 쓴 일기가 손에 꼽을 정도.


이것이 여행이 내게 안겨주는 선물.
늘 생각으로 머리가 꽉차 있는 내가,
하루라도 글을 안 쓰면 답답하고 우울한 내가,
여행을 가면
글 같은 건 생각도 안 난다.

그냥 먹고, 자고, 살고, 웃는다.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만나고 이야기하고 안고 눈을 맞췄다.

어디를 갔고, 무엇을 봤고, 어떤 것을 먹었느냐보다
누구를 만나 무엇을 느꼈는지,
가 더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무엇이었는지.




.
.

그곳에서 나는 그냥 나였다.
어린 시절 따위는 12시간 떨어진 한국 땅에 있었다.
터키에서 내것이라고는 
지금 이 순간의 나와 
한국에서 챙겨온 7kg 남짓의 배낭 뿐이었다.

그래서 아무 스스럼 없이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나는 정말 사람들과 잘 지냈다.
아무도 불편하지 않았고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
내 단점은 무엇인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을 지,
따위의 걱정은 없었다.

내가 좋으니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좋았다.



.
.


나는 한국 사람보다 외국 사람이 더 편하다.
나는 외국 친구들과 아주 잘 지내고,
외국에 나가면 인기가 많은데,
내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은
'Open'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번에 터키에서 만난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나는 굉장히 open되어 있고
감정 표현이 솔직해서
내가 무엇을 느끼는 지 모두 알 수 있다고.
그래서 굉장히 편하고 좋다고.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내 감정을 컨트롤하려 하고
들키지 않으려, 표현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외국에만 나가면,
외국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그게 잘 된다.

나 자신도 느끼긴 한다.
외국인에게 나는 벽이 없다.
내가 가진 사랑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다.


그건 내가 외국인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외국인과 있을 때 
나 자신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자신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외국에 나가 있을 때는
나를 얽매는,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을 한국에 두고 오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추한 내 과거.
더럽고 어둡고 울적한 나를
밝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나는 내가 정말 좋았다.
한국에 돌아오니 나는 내가 다시 싫어졌다.




.
.

하지만 중요한 건 
나 자신을 진짜로 좋아한다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을 줄 알고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받을 줄 알듯,
자기 자신도 사랑해본 사람이 사랑할 수 있다.

비록 한국에 와서 다시 자존감이 떨어졌지만,
한 달 동안 나 자신을 사랑했던 그 느낌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내가 너무 좋아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좋았던.

그 느낌을 기억하면서
앞으로의 삶에서
단 1초라도 오래 그 느낌을 느끼면서 살면 된다.

매 순간 행복할 수는 없다.
다만 1초라도 더 행복하려고 노력하면 된다.





.
.

사람에게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 성폭행 당했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실에 발목이 잡혀 나는 불행했다.

한국에서도 그냥 잊으면 그만 아니냐고? 

그건 잊는다고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이름이 싫다는 사람에게
그럼 네 이름을 잊어버려,
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기 이름을 잊을까.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은 잊지 못한다.

스스로 바꿀 수 있다면 바꾸고,
그럴 수 없다면 적응하고 살아가는 것일 뿐.


나 역시 내가 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을 잊을 수는 없다.
24년을 산 사람이 14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겪었던 일을 잊는 방법은 
뇌를 다치는 것밖에 없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그것과 함께 살아야 한다.
나름 잘 하고 있기는 한데,
성에 차지는 않는다.



.
.

아무튼,
이야기가 잠시 샜다.
사람마다 자신을 힐링하는 방법이 하나쯤 있게 마련인데
내게는 그것이 여행이다.

왜 굳이 비싼 돈 들여 여행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그건 게임을 왜 하냐, 친구랑 왜 노냐,
라고 물어보는 것과 다름 없다.

유희고 취미고,
치유이다.

앞으로도 여행을 많이 하면서 살고 싶다.



.
.

그런 의미에서 내년에 터키로 교환학생을 가볼까 한다.
터키 여행이 끝나고 든 생각이라서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다.
과 사무실에 가서 상담도 좀 받아보고,
이것저것 고려해본 다음 결정하려 한다.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가장 확고한 결심 중 하나이다.

원래는 치유여행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여행을 다녀와보니,
내가 구상했던 것이 지나치게 딱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유 여행이라는 것이 굳이 있을 필요는 없다.
그냥 여행을 하면 되고,
그것이 나를 치유해줄 것이다.

명상이 필요하다고 명상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는 없듯이.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이 먼저 행복해지고 싶다.
성폭력 상담소에서 일하면서
나랑 비슷한 처지의 생존자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내가 지금 그 일을 하는 건
오히려 생존자들에게 민폐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사회 봉사자들 중에는,
자신의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외부로 투영시킨 경우가 많다고.
즉,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남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으로 대리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고.

그러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남을 도우려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독이 될 수 있다고.

내게도 딱 맞는 말이다.
내가 지금 생존자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나 자신을 돕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생존자들 사이에 있고 싶어 하는 건,
그들 곁에 있으면 나 자신이 조금이나마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괜찮은
비교적 정상인,
비교적 양호한.

하지만 이런 비교를 통해 우월감을 느끼면서는
아무것도 도와줄 수가 없다.
내가 먼저 행복해져야 한다.



.
.

그래서 그냥 향후 몇 년 동안은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찾아서 하기로 했다.

여행 하고
교환학생도 다녀오고
워킹 홀리데이도 가고.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해야지.
터키 가서 영어 잘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왔다.
뿌듯했지만 
욕심도 더 생겼다.
지금 잘 해봤자 일상 대화 정도.

더 열심히 해서 읽고 쓰는 것까지 완벽하게 하고 싶다.




그래도 이제는 성폭행 문제 외에 
다른 일들에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좋은 현상인 것 같다♡

나 외에 다른 사람에게도 관심을 많이 가져야지.
내 문제 말고 다른 사람들 문제도 많이 들어야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느끼는지.

이제 교류해보고 싶다.
그렇게 사람들이랑 부대끼고
눈 맞추고
대화하고
사랑하면서 살다가 죽고 싶다.
그게 정말 정말 성공인 것 같다.

기쁘미  15.03.03 이글의 답글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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