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의식화   cinq.
  hit : 2435 , 2015-09-14 20:26 (월)


방금 미래의 남자친구에게
성폭력과 관련된 나의 경험과 현재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뮬레이션을 하다가,
놀라운 발견을 하나 했다.

요즘 관심이 생긴 오빠가 있어서
혼자 이것저것 상상 중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내 성폭력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이미 전에
성폭력 경험이 있다고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상대방의 질문은

'전에 말했던 성폭력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얘기해줄 수 있어?'
였다.

.
.

나는 상상 속에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경험 자체에 대해서는 지금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나중에 차차 이야기할게.'
그리고 내가 고소를 했던 과정,
그로부터 내가 얻은 것들,
지금의 내 가치관 등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경험에 대해 자세히 묻지는 않아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것과 관련된 지금의 상태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

예를 들어, 스킨쉽이 싫어? 같은 질문.'

상대방은 묻는다.
'스킨쉽이 싫어?'
나는 베시시 웃으며
'아니 좋아'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스킨쉽 자체는 좋아하니까.


'스킨쉽 자체는 좋아. 정말이야.
다만 싫어하는 스킨쉽이 있다면,
나를 못 움직이게 만드는 거?
내 팔을 잡는다거나, 입을 막는다거나.
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해.

그리고 음,
섹스가 싫지는 않은데-


밝을 때 하는 건 좀 별로 안 좋아해.'


밝을 때!
내가 밝을 때 섹스하는 걸 싫어한다는 걸
지금 깨달았다.

그리고 내게 불편함을 주었던 앞전 남자친구와의 섹스 모두,
주변 환경이 밝았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나는 왜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해도 불편할까?

라는 질문에
한 가지 답변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할 때는
늘 낮이었다.
내 벗은 몸,
아버지의 벗은 몸
그리고 그가 하는 행동과
그것이 내 몸에 행해지는 모든 것들을 내가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대낮이었던 것이다.

남자친구와의 섹스도 늘 밝을 때 했다.
낮은 아니었지만,
첫 경험도 DVD 방이었어서
옆에 큰 스크린이 켜져있었다.
덕분에 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후로도 펜션에서 불을 켜놓고 한다든지,
낮에 차에서 한다든지.

그래서 나는 섹스만 하고 나면
그게 그렇게 생각하기가 싫고
불편했던 것이다.

아 척추에서 전율이 흐른다.
내가 의식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 건져올린 느낌.

그래,
또 다른 사람과 했던 섹스는 상대적으로 덜 불편했다.
사실 큰 차이는 없었다.
똑같이 좋아했고
비슷한 정도의 애무와 삽입 시간이었다.
다만 이 때는 집이었기 때문에
좀 어두웠었다.
서로를 보기에는 충분했지만
그게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과의 섹스조차도 불편했던 건,
집에 어머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늘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을까, 하는 긴장된 상태에서 성폭행을 당했던 내게는
또 하나의 불편함이었던 것이다.

섹스와 관련된 나의 트라우마에 영향을 미치는
trigger 들을 포착한 것 같아서 기분이 정말 좋다.

그 전에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그냥 나는 성폭력 경험이 있어서 섹스가 불편하다,
는 너무 단순한 문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앞으로 섹스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혹은 앞으로 더 많이 섹스를 해야 한다는,
양적인 해결책밖에는 낼 수 없는 
너무나 단순한 인식이었다.


그러나,
내게 그런 트리거들이 영향을 주는 것이라면
그 구체적인 요소들을 다뤄나가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작업을 위해서는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던 그 장면을 다시금 떠올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었고
어떤 부분에 어떤 감정을 느꼈었는지를 알아야
현재와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
.

정리하자면,
현재 발견한 트리거들은 다음과 같다

빛(또는 소음)
긴장(누군가에게 들킬 수 있는 상황)

확실히 이 두 가지만 없어도 훨씬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다음에 누군가와 섹스를 하게 될 때
이 부분들을 조절하면 되지 않을까.
되도록 어두운 곳에서,
편안한 분위기로.


.
.


유레카.
좌절  15.09.16 이글의 답글달기

ㅠㅜ
무슨 일 이 있는거 에요

李하나  15.09.17 이글의 답글달기

ㅎㅎ별 일은 없답니다. 좌절님은 잘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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