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휴학   cinq.
  hit : 2365 , 2015-10-01 15:21 (목)


오늘로 발제를 모두 마치고
진짜 휴학을 하게 되었다.
사실 행정 절차는 지난 주에 마쳤기 때문에
더이상 학교에 나가지 않아도 됐지만
끝내야 할 발제가 있어서 계속 나가는 중이었다.

보는 사람마다 휴학했는데 발제를 왜 하냐고 물어봐서
좀 귀찮았다.
휴학했어도 내가 갑자기 빠지면 영향을 받게 되어 있는 발제는
하고 휴학하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고,
게다가 두 발제 모두 내가 흥미가 있는 주제라
크게 거부감이 없었다.

추석이 껴서 일도 시작안 할 거고,
발제는 한 번이라도 많이 할 수록 좋은 거니까,
그냥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같이 발제 준비하는 사람부터 모두들
'휴학했는데 도대체 왜 발제를 해?'
라고 너무나 궁금해하며 물어보는 것이었다.

나는 별로 고민도 해보지 않았던 일이고
그냥 할 거니까 한 거였는데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으니 할 말이 없고
나중엔 짜증나고 귀찮았다.
한 두 번 물어봐야지, 이거 원.

그냥 하면 하나보다, 하면 안 되나?

게다가 딱히 이유를 물어본 것도 아니고
'안 해도 되는 걸 도대체 왜 해, 이해가 안 가네'
라는 의미를 담은 질문들이라 더 피곤했다.
무슨 이유를 설명을 해도
그냥 '그래도 안 해도 되는데'
로 끝날 뿐이었다.

도대체 그 놈의 '안 해도 되는데'는 누가 정해놓은 건데?



.
.

휴학 결정을 늦게 하게 된 데다가
공교롭게도 발제들이 모두 앞 부분에 몰려 있었다.
개인 발제는 이미 끝낸 상황.

그리고 내가 휴학하던 날이 마침 조 발제 첫 모임 날이었다.
시작했다고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했다고 보기에는 좀 그런 애매한 진행률인데다가
오랜만에 동기들끼리 하는 발제이고
국제 개발에 대한 내용은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같이 준비를 했다.
그리고 어제 발제를 마쳤다.

그리고 오늘은 영어로 인권에 대해 발제를 했다.
이건 둘이 하는 거였는데
같이 하는 분이 계속 '안 해도 되는데'라면서,
왜 하시냐고 했다.
그러면서 본인이야 내가 한다고 하면 이득이지만
왜 하는 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발제 안 한다고 아무도 뭐라고 안 한다면서.

나는 영어로 인권에 대해서 발제를 해보는게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발제를 한다고 한 거였다.
구구절절 설명하기 귀찮아서
그냥 '이것만 하고 휴학하려고요'라고 대답했다.

그 분은 준비하는 내내
'안 해도 되는데'를 반복했다.

'안 해도 되는데 뭘 그렇게 열정적이시냐'
'안 해도 되는데 대충하세요'
'안 해도 되는데 뭘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적당히 하세요'
'안 해도 되는데 같이 했어요'



.
.


흐음
그냥 휴학과 발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좀 다른 거라 생각하겠다.

휴학을 했어도 내가 다닌다고 하고 조모임을 배정받은 거기 때문에
내가 나감으로 인해 나머지 조원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책임을 질 수 있는 선에서는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무리할 필욘 없지만, 내가 가능하다면.
이것 말고도 10월 둘 째주 정도에 발제가 하나 더 있는데,
그건 아직 시작도 안 했고,
내가 빠져도 크게 영향이 있진 않아서 신경쓰지 않고 
휴학했으니 못 한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일주일 뒤가 발제인데 휴학했다고 안 한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둘이서 하는 건데 휴학했다고 혼자 발제하게끔 할 수 없진 않은가?

게다가 나는 발제를 좋아하는데.
할 때마다 경험이 쌓여가니까.
특히 영어로 하는 발제는 완전 좋은 기회였다.
이제 영어로 인권에 대해서 표현할 수 있게 됐으니까.

영어로 발제를 준비하다보면
주제에 맞는 개념군을 형성할 수 있게되어서 좋다.
음, 그러니까

예를 들어 내가 '인권'을 주제로 발제를 준비하려면
계속 영어로 된 텍스트나 영상들을 접해야 한다.
나중에는 내용도 정리하고 
발제문도 써야하고.

그러면서 인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쓰이는
영어 단어, 표현 들을 습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inalienable rights
guarantee
protect
prohibit
social abuses


등등.
단어들 각각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이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내가 protect라는 단어의 뜻을 알고 있다고 해서
인권을 보장한다, 혹은 보호한다
라는 표현을 쓸 때 주로
protect human rights라고 표현한다는 것을 아는 건 아니다.
guarantee 도 마찬가지.

inalienable 이라는 단어도 알고
rights 라는 단어도 알지만
inalienable rights 라는 단어를 아는 게 아니니까.

각각의 주제별로 자주 쓰이는 표현이 있게 마련이다.
한국어에도 관용적인 표현이 있는 것처럼.
묶여서 쓰이는 단어들!
가령 최저임금은 주로 '보장한다'와 같이 쓰인다.
연금은 '수령하다'라는 단어와 자주 묶이고.

즉, 
한 주제마다 자주 쓰이는 명사, 형용사, 동사들이 있는데
발제를 준비하다보면 그것들을 습득할 수 있게 되어서 좋다.

전에 영어로 프레젠테이션 하는 수업을 들었을 때 그걸 느꼈다.
이렇게 습득해서 머릿속에 형성된 개념군과 의미군을 이용해
적어도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는
내가 유창하게 말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심폐소생술과 관련해서 영어로 잘 설명할 수 있다.
golden time,
chest compression
rescue breath
cardiac arrest
first aid
등이 이 주제와 관련해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들이다.


.
.


아무튼 여차저차 해서 모든 발제를 마쳤다.
이제 진짜 학교 가야 할 일 없다.

아쉽긴 하다.
탄력을 받아서 학교 다니는 게 재밌었는데.
그래도 그 아쉬움이 막 찐득한 아쉬움이 아니어서
나쁘진 않다.
억지로 휴학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게 있어서 휴학하는 거니까.
물리적으로 둘 다 같이 할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실질적으로 나에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주구장창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바로 저것이다.
모든 걸 얻을 순 없다.
우선순위를 따져서 얻을 수 있는 건 얻고
그걸 얻으려면 버려야 하는 것들은 버리는 것.

재미도 있었음 좋겠고
돈도 많이 줬으면 좋겠고
몸도 덜 피곤하고 가까웠음 좋겠고-
이 모든 걸 충족시키려면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가 없다.

학교 생활에 지장도 안 갔으면 좋겠고,
동아리 활동도 같이 병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등등.
새내기 때는 정말 저게 다 같이 안 돼서 많이 좌절을 했었다.

그런데 하다보니까 같이 되기 힘든 건
내가 아무리 괴로워해도 안됐다.
그래서 그냥 좀 쓰리지만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면 대외활동 하나 포기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활동이 있으면
아르바이트를 줄였다.

모든 걸 같이 할 수는 없으므로.
버린 자리에 채울 수 있는 것이다.




.
.


아무튼 휴학하면 걱정인 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꾸 잊게 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처음 시작하게 되다보니
뭔가를 잘 하는 나의 모습보다는
못 하는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되면서
자신감도 잃게 되고
쉽게 불행해지게 된다.

이번에 다른 일을 하게 된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잊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좀 안정적인 마음으로 교환학생을 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려면 그 기억을 되살려주는 사람들과 자주 만나고
그런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동아리 활동을 좀 더 해야겠다.

학교 친구들도 자주 만나고.



.
.

내가 잘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는 게 이상적이겠지만
사실 단기간에 돈을 벌려고 들어가는 건데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
휴학해서 오래한다고 하고 게스트하우스 직원으로 들어가볼까.
청소 일이 대부분이겠지만
그래도 여행자들 오고가는 거 보면서 나도 곧 갈 거니까 열심히 하자,
다잡을 수도 있고

외국 사람들한테도 내가 붙임성 있게 해서 친구도 하고 대화도 하고.
뭐 아무튼 
남은 4개월을 잘 꾸려나가봐야겠다.
사실 4개월이 긴 건 아니니,
걱정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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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행정실 과장님
제발 교환학생 좀 뽑으세요.
목 빠지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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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진짜 휴학이다!
오늘부터 일 구해야지.

내일은 친구랑 한복 입고 놀러간다.
비가 안 오기를!

질주[疾走]  15.10.02 이글의 답글달기

저도 청백님처럼 영어를 잘하는 날이 오겠죠. 청백님의 4개월을 응원합니다. 화이탱/

李하나  15.10.04 이글의 답글달기

감사해요:) 옛날사람님 영어 실력도 쑥쑥 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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