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같은 인생   huit.
  hit : 1927 , 2018-04-21 22:25 (토)


오늘은 미국 생활 때 알고 지내던 분의 결혼식을 다녀왔다.
졸업한 후 돈도 없고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몰라 침체되어 있었는데,
오늘 결혼식에 다녀오니 좋은 기운이 좀 충전된 것 같다.
정말 행복했고, 하루하루 감사했던 미국 생활.
그 때는 정말 신이 있다면 
내게 이런 시간을 선물해주시려고 그 고통을 주셨던 거구나, 싶었다.
눈물나게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고
그 감사함을 잊고 살다가, 
오늘 내가 얼마나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선물과 같이 여겼는지 기억이 났다.
사실 내게는 하루하루가 선물과 마찬가지다.
울다에 쓴 몇 년 전의 일기만 읽어봐도 그렇다.
내가 이렇게 편안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울다에 고통을 쏟아내지 않고도 잠들 수 있을 거라고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내 꿈은 그저 이 고통을 끝내고
트라우마를 모두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꿈이 이뤄진 것이다.
나는 지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고민하고 있다.
도무지 답을 찾을 수가 없어서 불안하고 
내 인생이 이대로 실패하는 것 아닌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 아닌가 싶어 너무 무섭지만,
이렇게 고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눈물나게 감사한 일이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고 내가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더라면
있을 수도 없었을 오늘의 나.
할 수도 없었을 고민.
행복한 고민이다.

대학 입학할 때부터 전공 정해서 필요한 공부하고
앞날을 착실히 준비해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대학 생활 내내 성폭행 치유에 매달려서 아무것도 못 했던 것 같고,
내 학창시절을 모두 앗아간 아빠에게 화가 났다.
이 새끼는 단순히 나를 폭행한 것뿐만이 아니라
내 인생의 황금같은 시간을 앗아간 거라고.
준 것도 없으면서 뺏어가기만 다 뺏어갔다고.

나의 학창시절이 너무 아까웠다.
제대로 목표를 세워 뭔가를 준비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우울과 절망과 분노, 트라우마가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기에-
그 과정을 지나온 지금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남지 않아 너무 후회했었다.

나의 20대, 7년을 온전히 치유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전혀 아까운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7년이라는 시간동안 14년 동안 겪었던 친족성폭력 문제를 깔끔히 정리하고
트라우마까지 모두 치유했다는 건 
정말, 정말로 대단한 일이다.
나 자신을 칭찬해주어도 모자랄 판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 시간이 아깝다고? 

아니야,
아니야 하나야.
너무너무 고생했어.
비록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내가 도대체 대학 생활동안 뭘 했는지
세상은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괜찮아.
나는 알아.
내 주변 사람들도 알아.
내가 그 7년을 얼마나 치열하게 보냈는지.

나는 27살이나 됐는데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사람이 아니라,
27살에 이미 간절한 꿈을 하나씩이나 이룬 사람인 거야.

.
.

지금이 너무나 불만족스럽지만,
생각해보면 없었을 수도 있는 날들이다.
나는 어차피 성폭력 생존자로써 언제 자살을 했을 지도 모르고,
트라우마를 가진 채로는 더더욱 삶에 집중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차피 끝날 뻔 했던 인생,
감사하게도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스물 일곱,
사회에서는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늦었다고 치부하는 나이지만,
나는 아직 살아갈 날들이 많다.
앞으로 내게 주어진 수 십 년의 선물과도 같은 시간들을,
소중히 살아내야겠다.
더 이상 나 자신의 앞날을 구겨진 종이 취급하지 말아야지.
어떻게 하면 예쁘게 칠해줄까,
어떻게 아름답게 꾸며줄까,
그 생각만 해야지.

내 삶이라는 스케치북을 정말로 소중하게 다루어주어야겠다.
내가 이것을 얻으려고 무지무지 노력했으니까.
남들보다 늦게 얻었다고,
남들보다 더 좋은 색연필을 갖지 못했다고
종이를 다 찢어버리고, 
백지로 남겨둔 채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 행동은 하지 않아야지.

꾸밀 수 있는 여백이 있음에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스케치북을 다 채우는 날,
아 정말 예쁘다고,
최선을 다해 채웠다고 말 할 수 있도록.

앞으로 많은 날들을 채워나갈 누군가에게
나의 스케치북을 보여주면서

"이것 보렴, 정말 예쁘지 않니? 남들보다 조금 얇고 구겨지기도 했지만,
나는 내 스케치북이 정말 좋단다.
너도 네 것을 예쁘게 채워보렴. 아름다운 너만의 스케치북을."

이라고 말 하고 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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