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huit.
  hit : 2038 , 2018-11-24 02:53 (토)

오늘은 집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원래는 6시 반이면 칼같이 퇴근하던 엄마가
8시가 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해봐도 받질 않았다.
아빠와 할머니에게까지 전화를 했으나
엄마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걱정이 되던 찰나,
9시가 넘어서 전화가 왔다.
친구들과 밥을 먹고 있다고.

별 일이 없으니 다행이었으나,
동생이 아빠에게 전화를 한 것으로 엄마가 성을 낸 모양이었다.
원래 아빠는 늦게 들어오셔서
엄마가 조용히 친구들과 놀고 오려고 했던 것인데,
동생이 전화를 하는 바람에 알아버렸다는 것이다.
동생은 또 엄마가 짜증을 내서 덩달아 짜증이 나버렸다.
10시 쯤 엄마가 돌아오자
아빠와 엄마, 그리고 동생은 각자의 이유로 짜증이 나 있었다.

소란이 좀 이는 듯 하더니
동생이 엄마에게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아마 많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오늘 일어난 일과 상관 없는 속에 있는 이야기까지
짜증에 섞여 나오길래
그냥 두면 괜한 스파크가 튀길 것 같아
동생과 엄마 사이에서 중재를 했다.
별 일이 아닌데
각자의 이유로 각자 다른 지점에서 난 짜증을
굳이 내지 않아도 되는 상대에게 내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엄마는 아빠에게 짜증이 났고
(통화로 무슨 대화를 한 모양인데 신경에 거슬리는 말을 들은 모양)
그 짜증을 동생에게 전화로 풀었고
동생은 그 말을 듣고 짜증이 났고
어쨌든 서로 그렇게 짜증이 돌고 돌았다.

아무튼 언성을 크게 높이는 일 없이 지나갔다.

.
.


그리고 나는 내가 좀 달라졌음이 느껴졌다.
전 같으면 이런 감정 다툼 정도는 모른 체 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알아서 하라지,
내 일 아닌데,
하면서.

아마 엄마와 친아빠가 큰 싸움을 잦게 벌이던 시절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 같았다.
그 때는 도대체 둘이 왜 싸우는 지 알 수도 없었고
어린 내가 말리기에도 판이 너무 컸기 때문에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거나, 욕설과 폭력이 난무했다.
뭔가 날아다니거나 깨지거나, 흉기가 등장하기도 했고.)
그저 귀를 막고서 
'나랑 상관 없는 일이다'를 중얼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게 버릇이 되어 있었는데
오늘은 엄마 말도 듣고 동생 말도 들으면서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그 점이 정말 기뻤다.
나도 변했구나.
변하고 있구나.

한동안 앞이 안 보이고
내가 세상 가진 게 없어서 서럽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이 정도로 변한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킹 데드를 본 게 영향을 준 것 같기도 하다.
등장인물들이 정말 뭐하러 저러나 싶을 정도로
서로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대화를 많이 하는데
그 모든 것들이 현실감이 넘쳐서
아 저렇게도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구나,
사랑하는 사이끼리는 저런 대화와 행동을 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한국 드라마를 볼 때와는 좀 느낌이 달랐다.
한국 드라마는 뭐랄까,
정말 드라마틱한 행동들을 한다.
대사도, 행동도 극적이거나 과장됐다.
하지만 워킹데드는 다르다.
정말,
정말 내가 아는 사람 이야기
혹은 내 앞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감정, 행동들이 엮여 나온다.

며칠 째 헤어나오지 못 하는 이유는
스릴 넘치는 스토리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잘 살아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일 것이다.

.
.

아무튼,
일주일 동안 누워서 드라마만 봤다고 조금 반성하고 있었는데
그리 헛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제는 관계에 조금 자신이 생겼다.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깊은 관계,
사랑을 나누는 관계,
더 관심을 가지는 관계,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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