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볕을 많이 쬐면 바래기 마련이다. 난 그게 싫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서웠다. 겁이났다.
차라리 어둠속에서 변하지 않는게 나을것이라 생각했다.
맘 깊숙한 곳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올때면, 어김없이 숨을 멈추고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마음의 심연에 숨, 소리, 빛 마저 다 먹히고 나면 온 몸의 촉각이 곤두서고 솜털이 쭈뼛거리며 세상과 경계를 이룬다. 그러고나면 세상을 뒤덮을 것 처럼 커져만 가던 쿵쾅거림이 거짓말처럼 멈춘다. 나는 숨기는 것을 잘 하게 되었다.
겁쟁이가 되었다.
몇년 째 마음에 담아 둔 사람이 있다. 녀석에게도 이런 저런 사정이 있어 머뭇거리다보니 둘 도 없이 친한 친구가 되고 말았다. 둘이 사귀는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때면, 주위 사람들이 나서 '무인도에 몇년 가둬놔도 아무 일 없을 사이'라고 대변해 줄 정도니 말 다했다. 3년 전, 숨기는 것을 그만 두기 위해 꿈을 핑계로 서울로 도망쳐왔다. 그러면서 변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언젠가 녀석에게서 두 해가 넘도록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전화가 왔었다. 울먹거리지는 않았지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무언가 억누르고 있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 푸념만 잔뜩 들어주고 통화를 끝냈다. 나는 심야기차표를 끊었다. 대기실에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자니 어느 순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내가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역질이 났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기차표를 개찰구 옆 휴지통에 버리고 왔다. 우연인지 비가 왔던걸로 기억한다.
오늘 아침, 오래간만에 녀석에게 문자가 왔다.
어린이 날에 뭐하냐. 나 서울에 친구만나러 갈껀데 너네 집에 가면 놀아주는거야?
어김없이 숨을 멈추고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미안ㅋㅋ 요즘 일 많은거 알잖아. 바빠서 못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