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티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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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6 07:19 (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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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이상은 방향을 제시해 주고, 희망을 자극하고, 열정을 강화시켜 준다. 하지만 우리는 이상을 우리 자신의 가치나 우리가 이루어낸 결과를 측정하기 위한 기준으로 삼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자아를 탐색하는 작업은 길게 보면 우리를 무의의 상태에 도달하게 함으로써 늘 평온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우리는 그런 작업을 통해 사물을 보는 관점을 변화시킴으로써 삶의 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의 속성은 달라지지 않겠지만, 그것을 보는 관점은 변화시킬 수 있다.
불만은 우리의 가장 확실한 안내자다
술, 담배, 섹스, 음식, tv, 권력 등과 같은 보상물은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을 뿐이다. 물질이나 다른 존재를 통해 일시적으로 행복감을 맛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런 물질이나 존재에 의존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물질이나 존재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게 되고, 잃어버리면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가 된다. 무언가에 의존하면 우리는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고, 어떤 사람이나 사물 혹은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고 만다.
관광객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자신이 우리가 찾아 헤매는 대상이고, 우리가 원하는 충족감과 행복은 바로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는 단지 그러한 사실을 잊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 마음의 치유/ 기 코르노 저/ 강현주 역/ 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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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티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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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6 04:08 (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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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러브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랑에 빠져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심리학적 현상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그 의미가 상대를 통해서 드러났다고 믿는다. 드디어 잃어버린 반쪽을 찾은 듯하고, 삶이 완전해졌다고 느낀다. 갑자기 평범하던 삶이 높이 고양되어서 온전해진 듯하다. 초인적인 강렬함도 맛본다. 이러한 느낌이 들 때,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우리가 지닌 심리학적 꾸러미 속에는 사랑하는 연인이나 배우자는 언제나 이런 황홀경과 열렬함을 제공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요구도 포함되어 있다. ---pp.9~10
사랑에 빠졌을 때의 황홀경을 맛본다 할지라도,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과 헌신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데에 짙은 외로움과 소외감과 좌절감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대체로 우리가 실패한 것에 대해 상대방을 비난한다. 상대방이나 관계 자체에 부가하고 있는 요구 또는 기대 같은 무의식적 태도를 바꾸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p.10
로맨틱 러브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관한 복잡다단한 태도이며, 이에 사로잡혔을 때는 저절로 올라오는 강렬한 반응과 감정들로 인해 마치 종교적인 비전 앞에 노출된 것 같은 열렬함을 경험하게 된다. … (중략) …
로맨틱 러브에 관한 서양인들의 이상은 12세기에 등장하는데, 이때가 트리스탄이 사랑의 묘약을 들이킨 시점이다. 처음에는 이런 문화적 현상을 코르테지아courtezia, 영어로는‘코틀리 러브’라고 불렀다. 코틀리 러브는 사랑 자체나 사랑하는 관계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관점을 토대로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는 종교적 이상의 영향을 받아서 남녀 간의 사랑이 영성적인 관계로 이상화되었다. 트리스탄의 세계에서는 코틀리 러브가 가부장적 태도에 대한 해독제 역할을 했다. 이는 여성성을 이상화하는 것으로써, 실제 트리스탄 같은 거친 기사들에게 자신이 섬기고 숭배하는 아름다운 여성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우주적인 여성을 숭배하도록 가르쳤다. 마법의 와인을 마시자마자 트리스탄이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숭배이다. 트리스탄이 응시하는 것은 이졸데가 아니라, 트리스탄에게 상징적인 어떤 신적이고 우주적이고 초월적인 것을 체현한 한 여인이다. ---pp.85~86
상대 여성이 바로 자신의 영혼이므로 영속적으로 완전함이나 황홀경의 비전을 상대가 제공해 주길 요구한다. 남성은 자기 아니마가 거주하고 있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대신, 바깥 세계나 외부의 환경에서 자기 영혼을 위한 자리를 찾는다. 남성은 만나고 있는 상대 여성에게 자신의 영혼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럴 때 남성은 대체로 내면세계의 이상을 상대 여성에게 투사하느라 바빠서 실제 자기와 함께하는 여성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나 가치는 보지 못한다. ---p.120
남성은 자기 아내가 요리를 하고 자녀를 키우면서 가정의 수입에도 기여를 하고 자신이 인간사의 분투로 시달릴 때 위안이 되어 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아내가 자기 아니마의 체현이기를 기대한다. 항상 아름답고 완전한 천상에서 온 신성한 여인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남성은 자신이 흠모하던 순수하고 빛나는 여신이 어떻게 완전히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이런 평범한 여인으로 변했는지 의아해한다. ---pp.129~130
이졸데처럼 여성이 남성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상처를 입으면, 여성은 묘하게도 남성으로 하여금 자기 칼이 자기를 향하게 하는 길을 찾아내어, 남성이 자기 힘의 충동으로 인해 스스로 상처를 입게 만든다. 그러나 그 즉시 남성은 자신의 필요를 깨닫고 사랑을 약속하여 여성을 믿게 만든다. 그러면 거의 마술같이 여성들은 남성을 용서한다. 여성은 자신의 적에게 칼을 사용한다. 그러나 남성이 검을 거두고 관계를 맺으려 들면 여성도 즉시 칼을 내린다. 공격성이 관계성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여성성은 대체로 현재의 진정한 관계나 애정을 표현하면 지난날의 적의를 내려놓고 과거의 상처를 잊는다. 이것이 여성에게 가장 고상하고 아름다운 본능 중 하나이고, 여성이 삶을 변모시키는 한 방법이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여성의 첫 번째 원리는 관계이고 이는 여성의 본성에서 가장 우세한 주제이다. 무엇보다도 여성은 관계를 위해 산다. ---pp.139~140
트리스탄은 여왕을 자기 혼자 소유하기 위한 권리를 주장한다. 이것은 전체 왕국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여왕을 한 개인이 훔치는 것이다. 자아ego가 자기self에 속하는 것을 횡령하는 행위이다. (……)
만일 트리스탄이 의식적으로 희생을 선택할 수 있었더라면, 여왕을 왕좌로 되돌려보내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를 이해했더라면, 그의 운명이 이 신화에서 전개되듯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졸데를 언제나 자기의 여왕으로 가까이 둘 수도 있고 본래의 모습인 여신으로 이졸데를 경험할 수도 있었다. 만일 내면세계를 바른 방식으로 살았더라면, 트리스탄은 자신의 영혼 즉 숭고한 여왕을 내면의 실체로 간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외부세계에서는 다른 여인과 자유롭게 인간적인 사랑을 경험하고 내면의 여왕은 응당 그러하여야 하듯 자신의 권리로써 열렬히 사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우리는 아니마를 내면세계의 여왕 자리에서 끌어내려 외부에 존재하는 육체적인 여성으로 만들려고 한다. 바로 투사를 통해 우리는 이런 행위를 하고 있다. 이것은 자아의 방식으로 아니마를 소유하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고, 그래서 아니마를 육체를 지닌 인간 속에 감금해서 개인적인 차원으로, 외부세계의 존재로, 그리고 육체를 지닌 존재로 경험하려 드는 것이다. ---p.162
로맨틱 러브의 이 양극단을 바르게 살면 삶에 도움이 되지만, 잘못 살면 삶이 파괴된다. 이런 점은 아니마의 양면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니마는 내면세계의 여왕인 아름다운 이졸데로서 남성이 가장 심오한 내면의 자신을 찾는 데 인도자가 될 수 있다. 반면, 환상의 여신 마야Maya로도 둔갑할 수도 있다. 긍정적일 때 아니마는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조력하지만, 부정적일 때는 일상의 삶을 갈기갈기 찢어 모든 실체를 현혹시킬 수 있다. (……)
아니마는 우리 삶에 판타지적인 측면을 창조하는 특질이 있다. 상징적인 차원에서 아니마의 판타지를 경험할 때는, 아니마는 거대하고 무한한 우주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이런 장면들이 개인적인 차원에 제한되어 있는 우리를 승화시켜, 보편적이고 영원한 세계로 초대한다. 우리는 우리 삶을, 그리고 우리 자신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영속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되고, 우리 각자의 삶을 지금까지 있어 왔던, 그리고 앞으로 있게 될 것들의 개인적인 발현으로 보게 된다. (……)
마야는 환상이다. 실체의 왜곡이자 실체의 상실이다. 신화는 로맨틱 러브로 인해 환상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수 있다고 일러 준다. 어느 날 이 환상에서 깨어나면 남성은 자기가 사랑에 빠진 여성이 자기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의 삶을 더 없이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을 것이라는 자각에 이른다. 아내의 경우라면, 어느 날 환상에서 깨어나서 자기가 혼인했다고 생각했던 그 남자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더 심한 경우는 자기 남편이 세상의 다른 남자들과 매한가지로 사려 깊지도 섬세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말하는 아내는 지금까지 남편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환상을 보아 왔던 것이다. ---pp.257~260
우리가 사랑을 조작하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이기적인 행동들을 정당화할지라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성질이 사랑에는 존재한다. 사랑은 자아가 원하는 것과 다르고, 또 우리가 속한 문화가 가르치는 것과도 다르다. 우리가 기대하는 감상적인 거품이나 과장된 엑스타시와도 다르다. 하지만 사랑은 실재한다. 우리 각자의 자아가 요구하는 것이 아닌,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 준다.(……)
사랑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가보다는 우리는 누구인가와 더 관련된 문제이다. 사랑은 어떤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상대방과 관계성과 유대감을 느끼는 상태로, 자신의 의도나 노력과 무관하게 일어난다.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저절로 일어나는 상대와 동일시되는 상태이다.
(……)
로맨스에 대한 과장과 흥분으로 인해 인간적인 사랑은 너무나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사랑을 제대로 바라보기가 어렵다. 사랑을 추구할 때도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사랑의 성격이나 태도를 배운다면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사랑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의 감정 안에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해 저절로 흐르는 따뜻함 속에 또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서로와 관계를 맺는 사소한 일상의 행위들 안에서 드러나게 된다. (……)
인간적인 사랑은 한 남자가 한 여자 안에 있는 고유한 가치들을 보게 만든다. 남자는 여자를 자신의 자아를 위해 이용하기보다 여자를 존중하고 도와준다. 사랑이 이끄는 바를 따를 때 상대의 필요나 행복에 관심을 기울이지, 자기 자신의 필요나 변덕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
로맨스에서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왜곡된다. 자아 중심적이어서 사랑의 본질은 상실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바른 차원으로 사랑을 추구한다면, 자기self 사랑 역시 진실하고 타당한 사랑이다.
- WE(Understanding the Psychology of Romantic Love)/ 로버트 A.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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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티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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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5 21:36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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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결코 병이 아니다. 그것은 행복의 정상적인 대극이다. 콤플렉스가 병이 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이다. 충만한 삶, 행복한 삶은 거의 불가한 행복의 상태 속에 두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고통을 참는 철학적 인내와 견고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삶의 충족과 전체성은 고통과 기쁨의 평형을 요구한다."(칼 G. 융)
이렇게 무의식의 의식화가 진행되면 결국 무의식성이란 없어지고 완전히 깨달은 상태가 되어 전인이 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무의식은 끝없는 세계이다. 아무리 의식화해도 미지의 세계는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자기self는 언제나 ‘나(자아 ego)’를 넘어선다. ‘나’는 오직 그 커다란 원 속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자아가 자기를 알 수는 없다. 그러므로 융은 자기실현은 반드시 완전해지는 것이기보다 비교적 온전해지는 것이라고 한다. p.140
분석심리학은 학문이지 세계관이 아니다. 학문이 곧 세계관이 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분석심리학은 환자에게 이미 만들어진 세계관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관을 구축하거나 개조할 수 있는 재료나 수단을 제공한다. 분석심리학이 세계관을 새롭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무의식적인 세계의 인식과 그것이 지닌 창조성이며, 그 밑바닥의 원천을 이루는 합리적으로도 파악하기 힘든 신화의 세계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다. “영원성, 원시인의 생활의 가장 큰 특징을 이루는 영원성이 우리의 삶에는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우리는 합리주의의 장벽을 우리 주변에 쌓아올림으로써 자연의 영원성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분석심리학은 합리적인 이성이 비난했던 무의식의 환상적인 내용들을 다시 발굴함으로써 이 장벽을 무너뜨리고자 한다. 이 상들은 장벽 너머에 있으며, 그것들은 우리 속의 자연, 즉 본성에 속하는 것이다.” p.231~232
- 분석심리학/ 이부영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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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티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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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5 14:52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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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졌을 때 자신이 갈가리 찢기는 바로 그 느낌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 힘과 용기가 있다면, 이렇게 산산이 부서져 버린후 새로운 의식이 탄생하는 것이다. 한 존재가 특별하고 더욱 소중한 가치를 지니면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길이지만, 진화를 위해서는 불가피하다. - 본문 72쪽에서
신화는 심리학적 통찰을 위한 풍요로운 원천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작품이 그러하듯 위대한 문학은, 인간의 조건을 세월의 빛에 퇴색되지 않도록 정확하게 기록하고 묘사한다. 신화는 바로 이러한 특별한 종류의 문학이다. 신화는 개인이 쓰거나 창조한 것이 아니라 전 세대와 문화 전반에 걸친 집단적 경험과 상상력의 산물이다. 7
‘사랑하는 것loving’과 ‘사랑에 빠진 것being in love’은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정의를
내리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을 진정으로 알아가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평범함과 실패 그리고 그 사람이 지닌 장엄함을 이해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삶을 투사projection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투사의 안개를 꿰뚫으면 그 사람 자체를 볼 수 있다. 땅에 굳건히 발을 딛고 있는 우리 개개인은 분명 경이로운 존재이다. 문제는 투사의 안개에 가려 상대의 깊이와 고귀함을 뚜렷이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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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안에 머무는 상태’가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다falling in love’고 하는 것이 비슷한 의미를 지니면서 우리에게 친숙한 표현이다. 신화에서 실수든 우연이든 에로스의 화살에 찔리거나 베어 사랑의 마력에 휩싸이는 이미지는 바로 ‘사랑에 빠지는’상태이다. 63
사랑하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그 사람 자체를 아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환상이 아니다. 자신이 특별히 디자인하고 만들어 놓은 이미지나 역할을 상대방이 해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것은 상대의 고유함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지속적이다. 오랫동안 유효하다. 진실이다. 만약 십수 년 전쯤에 누군가 나에게 사랑의 지속성을 이야기했다면 나는 충격을 받고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년의 지혜를 갖춘 지금은 사랑이 지속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간에 원형적 혹은 신적인 세계에 침투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신과 여신으로 보인다. 상대를 통해 서로 초개인적이고 초의식적인 존재 영역을 체험한다. 이 체험은 폭발력이 강하고 쉽게 불타오르는 신의 광기 같은 것이다. 시인들은 화려한 문체로 이런 체험을 묘사한다.
사랑에 빠진 연인이 서로를 쳐다보는 것을 지켜보면 이들은 서로를 넘어서 그 이상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상대를 너머 상대의 아이디어나 감정과 사랑을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랑 자체와 사랑하는 것이다. 여성은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신, 에로스를 바라보는 프시케가 되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최악의 소식은 이런 상태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상태는 분명 오래 가지 않는다. 어느 날 자신의 세상을 가득 채우던 아름다운 사람의 빛이 평범해지고 무디어진다. 초인적이고 신적인 특질은 희미해진다. 그 자리에 인간적이고 실질적이고 평범한 사람이 서 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고통스런 경험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신의 방문과도 같은 것이다. 남신과 여신이 인간세상에 등장했는데 이들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존재인 것과 비슷하다. 64~66
- 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 로버트 A.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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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티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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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5 07:54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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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의 내 인생의 책에서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친밀성의 구조변동) The Transformation of Intimacy(Sexuality, Love and Eroticism in Modern Societies)/ 앤서니 기든스 저/ 황정미 역/ 새물결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 Homo Ludens: A Study of the Play-Element in Culture/ 요한 하위징아/ 이종인 역/ 연암서가
읽은 내용을 내가 생산해 낼 때 내 지식이 된다
저는 책을 사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일은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그 책에서 나한테 필요한 부분은 목차를 읽어보면 몇 챕터 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필요한 것만 읽으면 됩니다. 시간이 없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책을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을 하고 기승전결을 갖춰서 책을 쓰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보통은 이렇게 쓰고, 저렇게 쓴 것들을 주제별로 모아서 책을 내요. 책을 쓰는 과정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사분란하게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반드시 그 순서를 따라서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봐요. 내 스스로 지식을 편집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저자의 이 부분, 저 저자의 이 부분을 내 마음대로 가져와서 엮어내고 내 지식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적극적인 독서법이라고 생각을 해요. 책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는 것도 좋고요. 그래서 요즘에 사람들이 블로그에 리뷰를 올리고, 독후감을 올리는 것도 참 좋은 문화라고 생각을 해요. 제 경험상, 내가 읽은 내용을 내가 생산해내는 경험을 할 때, 그게 내 지식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주제와 관련된 서너 가지의 책을 동시에 읽고, 그 내용을 내가 편집해서 내 이야기로 생산해내는 경험을 하게 되면, 그 책의 내용이 내 것이 되는 것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읽는 것보다는) 그런 적극적인 독서법이 훨씬 좋은 것 같아요.
현대인들은 위로의 경험이 필요하다
인간의 모든 행복, 기쁨, 슬픔, 괴로움은 모두 인간관계에서 오는 거예요. 그렇게 인간관계들을 겪으면서 지쳐가지만, 거기서 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경험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엄청난 위로와 위안의 경험이 되는 것 같아요. 현대인들이 가장 굶주려 있는 게 위로 받고 싶어하는 거예요. 오죽하면 임재범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라고 하겠어요. 여러분이라고 하지만 내가 볼 땐 거짓말이에요. 누가 나를 위로해줘요, 아무도 나를 위로해주지 않는다고요. 책을 읽고 있으면 그런 위로 받는 경험들을 해요. 전 그걸 케어 이코노미(care economy)라고 하는데, 현대에는 위로 받는 산업들이 무지하게 많이 발전이 되고 있어요. 옛날에는 가족이라든지 이런 인간관계 속에서 위로 받을 수 있는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졌거든요. 그래서 그 위로를 돈을 주고 사는 거죠. 예를 들면 상담, 코칭 같은 것들이 다 케어 이코노미에 들어가고, 큰 틀에서는 룸싸롱도 하나의 케어 이코노미라고 여겨져요. 갈 데 없는, 위로 받지 못하는 사내들이 돈을 주고 웃음과 따뜻함, 미소를 가짜인 줄 알면서도 사는 거거든요. 뒤에 보이는 그림을 좋아한다고 했는데요. 이 그림은 남아공의 리차드 스캇이라는 작가의 그림이예요. 심리학적으로 남자들이 가슴에 열광하는 이유도 결국은 소통의 부재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요. 이해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데에 대한 쓸쓸함, 고독감이 나를 완벽하게 이해해줬던 엄마의 가슴으로의 퇴행으로 나타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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