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프러시안블루   2011-09-09 14:59 (금) 
나만의 대나무 숲 만들기
;어디가서 시원하게 바람맞으며 마음속 이야기를 외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겠다.
- 억지웃음님 일기중에서 -

나만의 대나무숲이란 표현 참 좋네.


73. 프러시안블루   2011-08-09 01:41 (화) 
http://asx.kbs.co.kr/vod.php?title=TV문화지대&url=1tv$tvzone$best$best128.wmv

-낭독의 발견, 백기완 젊은날-

72. 프러시안블루   2011-08-06 16:04 (토) 
날아라 수만개의 눈으로
-박미산-

나는 공중비행하며 세상을 바라보네
결코 지면에 앉는 일이 없지
하늘을 가르며 점점 단단해지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
온몸이 팽팽해지고 용기가 넘치네
두려움 모르는 나의 날갯짓에
검은 그늘 번뜩이는 매도 떠밀리고 만다네

나는 꽃과 입 맞추는 자*
당신의 어깨 뒤로 태양이 뜰 때
목부용 꽃 앞에 가만히 떠 있네
꽃 속의 미로를 헤집던 가늘고 긴 부리
꽃가루를 지천으로 묻힌 채
이슬 젖은 나뭇잎을 뚫고, 세상의 폭포를 지나가네

나는 지금 꽃의 나날
연분홍빛 봄을 보며 독도법을 익히리
비바람 천둥번개가 북적거리는데
나의 배 밑에는 짙푸른 여름이 깔려 있네
천변만화의 계절을 피우기 위해, 나는
무지개빛 날개를 반짝이며 수만 개의 눈을 크게 뜨네

* 브라질에서는 벌새를 '꽃과 입 맞추는 자'라고 한다


71. 프러시안블루   2011-07-13 00:06 (수) 
내가 일천 번도 더 입맞춘 별

-이가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중에서-

70. 프러시안블루   2011-07-12 01:50 (화) 
<평전>



박혜정... .

그가 떠난 후 십 년이다. 그 시간은 길었다. 우리는 대학을 떠났고 취직을 했고 결혼을 했고 아이들을 낳았다. 기억은 후일담이 되었고 세상은 달라졌다.
때로 팍팍한 일상 위로 몇몇 낯익은 얼굴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 얼굴들로 표상되는 우리의 젊은 날이 떠오를 때가 있다. 박혜정도 그 얼굴들 중 하나이다.
그의 짧은 삶이 긴 죽음과 맞선 오늘, 감히 십 년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말하고 싶다. 세상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말하고 싶다. 그는 아직도 우리의 현재라고, 영원한 현재라 말하고 싶다.

박혜정은 1965년 1월 19일 경기도 양평에서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눈이 맑고 웃기 잘하는 귀여운 짱구였다. 후에 그는 <짱가>라는 노래를 자신의 주제가로 삼았다. 그의 지인들에게 그에 관해 물으면 제일 먼저 듣게 되는 평은, 그가 착하고 심성이 고왔다는 것이다. 가족들도 그렇게 박혜정의 유년을 기억한다. 모질고 짓궂은 짓을 싫어하고, 짱가처럼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서서 도와주길 좋아하는, 착하고 의협심 강한 아이로 그는 자랐다.

71년 구로국민학교에 입학한 그는, 5학년 때 아버지의 전임으로 강원도 화천으로 내려갔다 다시 6학년 때 서울로 돌아와 77년 구로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한강여중에 입학했다. 자주 떨어져 살기도 했던 그의 가족은 동기간의 우애나 가족애가 남달랐다. 아버지가 가정의 화목과 평화를 매우 중시했기 때문이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가끔 벽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살기를 원했다고 한다. 교사시험과 장교시험을 동시에 보았는데 장교시험 발표가 먼저 나서 그쪽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그때 한시바삐 입 하나 덜겠다고 군에 투신하지 않았던들, 아니, 만약 교사시험 발표가 먼저였던들, 아버지의 삶이나 그 가족의 삶이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가족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들 가족이 함께 살던 동안은 정기적으로 가족오락회가 열렸다. 오락회가 열리는 날이면 저녁식사 후 마루에 둘러앉아 과일을 깎아놓고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고 놀이를 하는 등 단란한 한때를 즐겼다. 혜정은 오락회 때 무슨 노래를 부를까 여동생과 상의하곤 했다. 이런 실력함양 덕택에 그는 노래를 꽤 감동적으로 잘 부르는 편이었다.

박혜정이 중학교에 다닐 때 식구들이 모두 서울 신림동으로 이사와 498-18번지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죽기까지 계속 그곳에서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아직도 18번지에 얽힌 불안을 버리지 못한다. 18번지에 사는 동안 나쁜 일들이 많이 생겼다고 믿는 어머니의 불안의 중심에는 그의 죽음이 자리잡고 있다. 그의 가족들은 이제 18번지에 살지 않는다.

중학교 때 박혜정은 성적이 우수했고 글솜씨가 뛰어났다. 그의 문재(文才)의 탁월함이 입증되기 전인 중1 때, 국어선생이 그의 시를 읽고 누가 써준 게 아니냐고 심한 추궁까지 해 오랫동안 상심했다는 일화가 있다. 중학교 동창의 추억담에 의하면, 그는 또래 아이들이 갖는 변덕스러움과 토라짐이 없었고 마음이 따뜻했다고 한다. 80년 한강여중을 졸업하고 신광여고에 입학한 후에도 그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군무에서 물러나 중소기업체 간부사원으로 근무하게 된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83년 서울대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의 삶은 평탄했다. 박혜정 자신의 표현에 따르자면 열아홉 이전까지의 그의 삶은 "자기모순이 없는" 삶이었다.

인문1계열에 입학한 박혜정은, 중문학과와 연계된 LA2반에 배정되었다. 대학 1년은 그에게 혼란과 모색의 과정이었다. 그는 팀에 가입해서 학습과 훈련을 받았고, 엠티와 합숙과 농활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원만한 편이었고 모든 일에 성실했다. 강하게 주장을 내세우지도 않았고 유약하게 흔들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2학기에 접어들면서 급진전한다. 1년 차이로 대학 2학년이 대학 1학년의 아버지와 교사 노릇을 하던 그때, 누구에게나 선배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강박이었다. 그에게 가을은 전환기였다. 그는 "이제 곧 내 나이 스물, 책임을 질 때가 왔다"라고 선언한다. 동시에 그는 조심스럽게 삶과 죽음의 문제를 캐묻기 시작한다.


무엇이 날 이렇게 虛虛롭게 하는가?
무엇 때문에 나는 이렇게 彷徨해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것인가?
고통스럽다.
산다는 건 아픔이다. 그렇다면 죽는다는 건 뭘까?
살기 위해서 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가?
난 지금 어떤 삶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내 존재의의는 어디서 찾아지는 것인가?


그가 수많은 물음표를 찍던 그 가을의 끝, 황정하 학형이 시위를 주도하다 도서관 난간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가 대학에 들어와 겪은 최초의 죽음이었다.

84년, 박혜정은 원하던 대로 국문과에 진입했다. 84신입생과 83진입생이 함께 쏟아져 들어와 몹시 벅적대던 국문과 분위기를 그는 "국문과에 온갖 명물들이 다 모였다"고 기록하고있다. 그는 삶의 자세를 새로이 정비하면서 "용기가 없어서든 혹은 삶에 큰 의의를 느껴서든, 죽지 못하든, 죽을 수 없든, 안 죽는 것은 명백하다"고 결론 내리고, 죽지 않는다면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결심한다. 이때 그는 절대로 스스로 죽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을 덧붙여 놓았다. 그러나 이후 혜정은 삶 속에서 심한 결핍을 느낄 때마다, 자신의 삶이 의미보다는 공허로 메워진다고 느낄 때마다,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했다. 그는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듯이 피곤해지면 죽음을 생각했다". 불행히도 그의 결핍감과 자기모순은 점점 커져가기만 했다.

그해 봄 학원자율화 조치로 교내집회가 가능해졌고 학생회가 구성되었다. 그해 내내 교문싸움과 도서관 철야농성이 쉴새없이 반복되었다. 그는 활발한 2년차답게 바쁘게 활동했다. 오픈써클에 투입되어 활동했던 그는 과에 자주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그의 모습에서 흔들림을 느낄 수는 없었다. 9월 19일 그는 시위 도중 관악서에 연행되어 이튿날 오후에 풀려났다. 그는 풀려나자 곧 학교로 올라와 집회에 참석한 후 귀가했다. 그는 지쳐 있었고 왼쪽 뺨에 돋은 뾰루지는 잔뜩 곪아 있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자기관리가 철저한 편이어서 무단외박 한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으로 곪았던 문제가 터지듯, 이 작은 사건은 집안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아버지는 그를 설득하고 통제하려 했다. 그는 학교로부터도 집으로부터도 떠나고 싶었다. 모든 문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휴학과 공활.
이것이 "차분히 혼자"가 되기 위해 그가 택한 길이었다. 그는 4주간 제책공장에서 일했다. 그의 공장활동은 이중적인 시험이었다. 과연 자신이 민중적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소박한 훈련, 집과 가족을 떠나 독립할 수 있는가 하는 준비. 그러나 공활은 그에게 뼈아픈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그는 휴학기간을 지옥의 시간처럼 길게 경험했다. 당시 그의 글에는 죽음에 대한 강박이 짙게 그림자져 있다.

85년 봄, 박혜정은 복학했다. 그는 수업에 충실했고, 글을 많이 썼고, 만취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꽤 자주 술을 마셨다. 그는 죽기 한달 전, 자신이 썼던 대부분의 글을 불태웠는데, 특히 85년에 쓴 글은 거의 남아있는 게 없다. 가까이 지낸 친구들이나 같은 방을 쓴 동생의 기억에 의하면, 그는 85년에 가장 많은 글을 썼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늘 문학에 대해 열렬한 관심을 품고 있었지만, 한번도 드러내놓고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쓴다고 말하지 않았다. 문학에 대한 어떤 생각이 그를 그토록 조심스럽고 부끄럽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문학을 업으로 삼는 것에 회의를 느꼈으며, 문학을 도피처로 삼는 자신을 미워했던 것 같다. 그해 겨울 그는 소설을 쓰려고 했고, 택시 운전사가 되기 위해 운전을 배웠다.
부모님은 그가 운동을 그만둔 것을 알았고, 그런 만큼 우려의 마음도 가라앉았다. 정이 많고 착한 예전의 맏딸로 돌아간 혜정은 서서히 어머니를 이해하고 어머니와 친밀해졌다. 운전연습을 하고 돌아온 겨울 어스름, 종종 그들 모녀는 안방에 누워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택시 운전사가 되겠다는 그의 말을 듣고 어머니는 웃었다. 말도 안 된다고, 서울대 나와서 택시 운전을 하는 사람이 어딨냐고 대꾸했던 어머니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그때 택시 운전하겠다고 할 때 차라리 그냥 그러라고 할 것을……. 그렇게라도 살게 해줄 것을……."
그러나 비단 어머니뿐이었으랴. 서울대라는 특권이 그에게 얼마나 힘든 짐이었는지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람이.

86년, 그는 어떻게든 살고자 했고 남고자 했다. 더이상 무의미한 삶을 지속할 수 없다는 부끄러움의 끝에서 그는 다시 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한다. 함께 일했던 선배와 동료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자신에게 적합한 활동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우리 모두를 좌절과 분노와 절망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86년 봄이 시작되었다.
그는 일을 선택하는 데서 자신이 기회주의적이지는 않을까, 주어진 일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는 건 아닐까 끊임없이 두려워했다. 그가 다시 운동을 하기에 상황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운동권은 이미 내분의 씨앗을 품고 있었고 외압도 강화되었다. 그는 결국 운동을 재개하려던 결심을 철회하고 4월 초 홀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떠나기 전 그는 목욕탕에서 자꾸 뭘 태웠다고 한다. 뭘 그렇게 태우냐고 어머니가 나무라자, 그는 쓸데없는 것들을 좀 정리하려고 그런다고 대답했다. 이때부터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있었던 것일까? 돌파구를 찾으려던 모든 모색을 한줌의 재로 바꾸어놓고 떠나고자 했던 것일까? 유서를 제외하고 그밖의 유고는 그가 남기고 싶어 남긴 글이 아니다. 미처 태우지 못했던 것이 강의노트 사이에, 책갈피 사이에 남아있는 것일 뿐이다. 추모집에 실린 유고, 이제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만 그를 읽게 되는 이 자투리 글들은, 그의 마음의 가장 가장자리, 가장 남루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4월 28일 월요일 아침, 김세진 이재호 학형이 분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학교는 끓어올랐다. 그가 대학에서 겪은 두 번째 죽음이었다. 그는 한동안 몸을 떨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5월 20일 화요일 오후, 오월제 기간이었고, 아크로에서는 문목사의 강연이 있었다. 친구들과 IMC 앞 장터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그의 귀를 찢으며 날카로운 비명과 쉴새없이 터지는 최루탄 폭발음이 들려왔다. 아크로에서 달려온 학우들이 소리쳤다.
학생회관에서 학생이 떨어졌다고…… 활활 타는 불길로 떨어졌다고…….
이동수 학형의 분신 뒤로, 건물 유리가 모조리 박살나는 격렬한 교내시위가 시작되었다. 많은 학생들이 울면서 시위를 하던 그날 박혜정도 울며 돌을 던졌다.
그 밤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고 다음날인 21일, 그는 학교에 잠시 올라갔다 친구의 자취방에 들렀다 집에 돌아간다고 저녁 여덟시쯤 신림동 버스정류장에 섰다. 이후로 그를 본 사람은 없다. 그는 한남대교에 유서가 든 가방을 내려놓고 한강에 투신했다. 그렇게 그는 스물한 해와 넉 달 남짓한 짧은 생을 끝냈다.

22일 가방이 발견되어 집으로 전달되었고, 23일 익사한 그의 시신이 발견되어 중대 부속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었다. 그의 시신은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되어 뒷산에 재로 뿌려졌다. 몇 년 후, 화장터 옆에 군부대가 생기면서 뒷산에 철조망이 둘러져 그를 뿌린 자리에 접근할 수가 없게 되었다. 89년, 함께 일했던 팀의 선후배들과 친구들이 돈을 모아 인문대 1동 옆 잔디에 식수를 하고 비목을 세웠다. 작년(1995)에 비목이 어딘가로 유실되었다. 이제 십 년, 박혜정 학형을 알았던 모든 이들이 정성을 모아 그가 편안히 깃들 자리에 추모비를 세우고자 한다. 그가 죽은 후, 그에 관한 모든 것이 그의 뜻과 무관하게 되어졌고 행해졌다. 이 평전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그를 옭아매지 않고는 그를 기억할 방법이 없다. 원망 없이는, 그가 숨어버린 자리를 들여다볼 용기가 없다. 욕하기 잊기를 바랐던 그에게, 그저 하나의 욕된 글만을 덧붙인다.

십 년 동안 자라난 그의 죽음과 우리의 부끄러움.
80년대에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 그 떠남을 겪으며 살아온 우리들.
이제 서로에게 말하자. 남은 자들의 부끄러움은 남은 자들의 힘이라고…….

- 친구 권희선.

[출처] 유서 - 박혜정|작성자 하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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