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경험에 매달리는 이유   치유일지
  hit : 3372 , 2013-03-15 19:34 (금)



나는 
성폭행 경험에 
매달리고 있다.
엄마는 '그냥 잊어버리고 살어'
라고 종종 이야기 하지만
나는 아직 그러고 싶지 않다.

물론 당연히 극복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잊어버리는 것'은 
극복도 해결도 아니다.
'회피'일 뿐이다.



.
.

첫 째로,
나는 성폭행 경험에 대해서 기록해두려고 
끊임없이 노력 중이다.
잘 안 되기는 하지만.






삶을 기록해두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사람은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언젠가는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그냥 잊어버리게 된다면
물론 그대로 잊어버리면 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잊어버린 기억은
물리적으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식으로든 무의식에 저장이 된다.
그리고 그 무의식은
평생토록 나에게 영향을 끼친다.

나중에는
'내가 왜 이러지?'
하고 궁금해하기만 할 뿐
그 답을 알 수가 없다.
그 답이 되는 열쇠는 이미 기억에서 사라져
무의식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 답의 열쇠인 '경험'을 
기록해두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성폭행 경험을 
부득불 기록하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미 지나간 일임에 분명하고
나는 그냥 내 갈 길 가면 되지만
그 경험들은 분명 
나의 무의식에 짙은 상흔을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흔은
나의 삶의 여러 방면에서 영향을 끼쳐 올 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하지만 표상적인 기억은
점점 옅어져 갈 것이다.
워낙 강렬한 기억이라 쉽게 지워지지는 않겠지만
행복하게 살다보면 언젠가는 기억의 피안 속으로
점점 멀어져갈 것임은 분명하다.

어떤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내가 왜 이러지?'
하고 생각해봤자
답을 구하기는 어렵다.
그 답의 열쇠인 '성폭행에 대한 기억'이
이미 무의식화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적어놓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표현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의식화 시키기 위해서.



둘 째로,
나는 성폭행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노력 중이다.
입 밖으로 이야기하고 표현하기 위해.



무슨 고민이 있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나면
그 무게가 확실히 줄어들 때가 있다.
아주 평범한 일이다.
고민이 있다거나
속상한 일이 있다거나.
누구나 다 
그런 일이 있으면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그 일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면서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런 아주 간단한 이유에서
나는 내가 겪은 일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무슨 대단한 이유를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단지 '수다'를 떨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 
그 무거움을 털어버리고 싶은 것 뿐.

그렇게 이야기하다보면
감정도 튀어나올 테고,
감정을 털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증오, 혐오, 분노, 억울함, 슬픔, 죄책감, 수치심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표출되지 못하고
안에 쌓여 있는 것은
사람을 굉장히 힘들게 한다.

정신의 에너지가 그것들이 잘못된 곳에
분출되지 않도록 하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쏟는 정신 에너지가 상당하다.

이는 거실에서 TV보면서 아무도 없는 방에 
쓸데 없이 불을 켜놓는 것과 다름 없다.
'낭비'인 것이다.
정신 에너지의 낭비.
그 에너지들을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쏟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래서 나는
그 감정들을 처리하는 데 쓰이고 있는
나의 정신 에너지가 너무 아까워서
그 감정들을 얼른 털어버리고 싶다.


셋 째로,
나는 성폭행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상담소 안의 작은 공동체에서만이 아니라
가족들, 학교 사람들, 그리고 내가 다니게 될 직장 사람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 사회에까지.

이건 내가 정말 원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그런 충동이 드는 건지
아직 확실한 판단은 안 선다.
차근차근 검토해볼 생각이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이유는
오해, 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다.
내가 우울한 이유
내가 가끔씩 힘든 이유
에 대해서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사람들이 모두 칭찬을 해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단순하고 
어린 이유인 것을 보니
아마 이건 그냥 '충동'인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정말 행복할 것 같은데
행복은 가장 중요한 것이니
이도 가장 중요할 것 같긴 하다.

나는 당당하고 통합적인 나로 살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지금 충분하지만
만약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
.


이것들을 이루기 위해
더 행복해지기 위해 나는 계속해서 성폭행에 매달린다.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울다에 일기를 쓰고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풀어내고
상담을 받고 
상담소에 나간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내가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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