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켜내고 싶었던 것   trois.
  hit : 2767 , 2013-08-20 16:26 (화)



글로 쓰다보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상황은
어쩌면 말이 안 되는 상황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일상생활을 하다보면
그런 것쯤은 뭔가 혼란스러워지고 만다.
뭐가 심각하다는 거지? 
하고.


할머니는 시장에 다녀오시면
아이스크림을 네 개 사가지고 오셔서
우리더러 먹으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
내가 지켜내고 싶었던 것은
그저 이 아이스크림 네 개였을 뿐이다.

그거면 되는데,
그게 너무 어렵다.
왜 어려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
.

하지만
만약 내가 이 아이스크림 네개를 지켜내려고 
용을 쓰지만 않았던들
나는 좀 더 빨리 그 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토요일 밤의 외식이라든지
일요일 아침, 거실에서의 TV 시청이라든지
수요일인가 화요일 밤 
시켜 먹는 치킨 한 마리라든지.

왜곡되나마
나는 그 네 조각들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넷이서 사는 일상을 
나는 너무도 지키고 싶었다.

나 때문에 그것이 산산조각 나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계란말이라든지 스팸 같은 것들, 
그리고 오이 냉채 된장 찌개 같은 것들이 
올라오던 일요일 아침상.
아침을 먹고 나면 
빠다 코코넛이라는 과자를 커피에 찍어먹으며
둘러 앉아 보던 드림팀이라는 프로그램.

나는 그 안에 앉아 있으며
어째서 이 네 사람이 모여 앉아 있을 수 있는 걸까.
저 사람은 내일 아침에라도 당장 내 방에 들어와 
나를 못 살게 굴 것이고,
저 여자는 그런 것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저 남자가 좋다고 입에 과자를 넣어주고 있으며
내 동생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그런 기묘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이 정도면 됐다, 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았었다.


어쩌면 
그런 것 따위 집어 던졌더라면
나는 좀 더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
.


나는 
기묘하지만 기분 좋았던
그 일상들이
너무나 갖고 싶었던 것이다.
내 몸을 바쳐서라도.

왜 엄마에게 말을 할 수 없었으며,
왜 그 집에서 도망나올 수 없었는지
이제야 분명히 알 것 같다.

13살의 하나는
엄마, 아빠, 동생이랑 같이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14살이 되어도
19살이 되어도
22살이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나도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산산조각이 나버린 도자기인데,
다시 붙여보겠다고
테이프로 칭칭 감아도 보고
내 손에 피를 흘려가며 
그 도자기를 끌어안고

이제 되었다면서
이 정도면 붙었다면서
버리지도 못하고 놓치도 못하고
계속 그 도자기를 끌어안고
피를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
.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내 몸과 바꿔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고
포기할 줄 알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깨닫기에는
나는 
슬프게도
그런 것들이 너무 소중한 어린 아이였다.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아이였다.

그래서 그들이 나쁜 것이다.
내가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것들을 담보로 잡고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버렸다.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가 그토록 잡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라며 늘 비난했던 것을
스스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족 코스프레.
그가 아빠랍시고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나를 안거나
나에게 잘 해주거나 할 때면
나는 속으로
'가족 코스프레 그만 하시지'라며 비웃곤 했다.

그런데 그 코스프레를
나도 혼자서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 조각의 퍼즐이 흩어지지 않도록 
몸부림을 쳐가면서.
가족이라는 그림 속에 묶어두려.



.
.


가족이,
아닐 수도 있구나.
어떤 의미에서는.




아, 그렇구나.
나를 낳아주었다고 해서 무조건 엄마인 것도
무조건 아빠여야 하는 것도 아니구나.

엄마
아빠
라는 단어가 지닌
광의의 표현에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구나.



엄마
에는 두 종류의 의미가 있다.
협의로는 난자를 제공하고, 
수정된 상태의 나를 열 달 동안 품다가
출산한 사람.

광의로는
그렇게 낳은 자식을 기르고 
보호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

덧붙여 현대 사회에 이르러서는
사랑으로 자식을 돌보고
교육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
을 뜻한다.


아빠
에도 두 종류의 의미가 있다.
협의로는 정자를 제공하는 사람.

광의로는
그렇게 낳은 자식을 기르고
보호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

현대 사회에 이르러서는,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경제적 의무와
교육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
을 뜻한다.



.
.


나의 아빠와 엄마는
협의는 만족시킨다.
나의 몸은 그 두 사람의 유전자가 반씩 구성하고 있으니까.
그들이 어느 날 섹스를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태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광의는 만족시킬 수 없다.
나를 보호하지도 않았고
사랑으로 기르지도 않았으며
사회적으로 
교육의 의무를 다하지도 않았다.
교육은 공교육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광의의 부모 역할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아야 할 듯 하다.
그냥 낳아준 사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처량하게 슬프지만
비라도 맞고 싶은 기분이지만
스스로를 동정하지 않으려 애쓰며,
깨닫는다.




나는 재수 없게도,
부모는 있으나 그 부모가 좋은 부모는 아니었다.
도자기는 깨어졌다.
그들에게 기대해서 돌아오는 것은 없다.
내가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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