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집   quatre.
  hit : 3637 , 2014-05-30 13:22 (금)


집을 나온지도 어언 반 년이다.
지난 12월 중순에 나왔으니.
엄마와는 그동안 전혀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
일요일에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잘 지내냐고,
어디 있냐고.
통화 좀 하자고.

전화를 받지 않았고,
카톡 답장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반가웠다.


.
.

다음 날에 다시 전화가 걸려 왔고,
전화를 받았다.

아주 어색할 줄 알았는데,
엄마라서 그런 지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그저 며칠 떨어져 있었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화요일에 만나기로 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
.


화요일 저녁에 만나서 같이 밥을 먹었다.
엄마는 날 보더니 손을 잡으면서
'오랜만이야'라고 말했다.
아주 살가운 목소리로.

나도 싫지 않았다.

돈까스 집에 들어가서 회덮밥을 시켜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밥을 먹었다.
엄마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동생이 대학에 들어가니 돈이 많이 들어간다고,
그런데 내가 대학 다닐 때 손 한 번 안 벌린 거 생각하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역시 싫지 않았다.



내 신발을 보더니 신발이 이게 뭐냐면서
신발 가게에 가서 예쁜 샌들도 사줬다.
내가 보기엔 멀쩡한 운동화인데
동생도 엄마도 보기만 하면 신지 말라고 뭐라고 한다.

아무튼 요즘 신발을 못 사고 있었는데
신발이 생겨서 좋았다.
용돈도 10만 원 받았다.

엄마도 돈 없는 거 아는데,
미안하다며 주는 거라 못 이기는 척 받았다.
사실 돈이 좀 필요하기도 했고.



그러고 나서 집에 들어와서 자고 가라길래,
짐이 다 밖에 있어서 불편하다며 핑계를 댔다.
이렇게 바로 들어가는 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카페에 가서 얘기를 하자고 해서
카페에 데리고 갔다.
카페에 앉아서 사진도 보고, 
이런 저런 얘기도 더 했다.

신발도 신어보고.



오랜만에 엄마랑 만나서 얘기를 하니까 좋았다.



.
.


아직까지도 엄마가 나한테 사과해주고
다시 만나게 된 게 기분이 참 좋다.

참 묘한 일이기는 하다.
집을 나올 때는 그렇게 미웠는데-
가족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전 같았으면 머리로 막아보려 했을 것이다.
이러면 안 된다,
내가 성폭행 당할 때 구해주지도 못 했고,
고소할 때도 도와주지 않았던 사람이다.
좋아하면 안 된다.



하지만 이제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 그걸 잊지는 않았다.
엄마가 분명 잘못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좋은 것 역시 사실이다.

이 두 가지 모순되는 감정을
어느 쪽도 싫어하지 않고 그냥 느끼기로 했다.
실제로 느껴지는 감정인 걸,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그리고 그닥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기로 했다.
딸이 엄마를 좋아하는 게 뭐가 나쁠까.
엄마와 가깝게 지내고 싶고
엄마가 따뜻하게 대해주면 기분 좋은 게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




나도 엄마랑 다시 잘 지내고 싶다.
다시 집에도 들어가고 싶고
동생이랑 할머니랑 넷이 다시 놀러도 가고 싶다.

이런 일상들이 그립다.
친구 집에서 편하게 대해주시기는 하지만
내 가족은 아니다.
친구의 가족일 뿐이다.

수 십년 동안의 유대를 내가 어떻게 몇 달 만에 가질 수가 있겠는가.
여기에서 나는 바깥 사람이다.

나한테 다들 잘 해주신다.
아무도 짜증을 내지도 않고 혼내지도 않는다.
뭐라고 하지도 않는다.

이걸 잘 해주는 거라고 느끼고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냉철하게 본다면 
이건 내가 주변인이라는 것이다.

친구에게는 짜증도 내고 화도 내고 혼도 내는 건,
가족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잘해주기만 하는 것은, 
내가 외부인이기 때문이다.

싫다는 게 아니다.
나에게 이 정도로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한다.
다만,
이제는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 뿐이다.



.
.


하지만 이대로 그냥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분명 풀어야 할 마음이 있다.
어떻게 시작한 일인데,
여기서 흐지부지 되면 
언제 또 할 수 있을 지 모른다.

엄마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아빠가 나를 성폭행 한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알면서도 왜 신고를 하거나 알리지 않았는지,
나를 왜 계속 집에 두었는지-

이걸 묻고 싶다.
묻고 풀고 싶다.

그래야 다시 엄마를 편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도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하지만 저런 의심들이 그 사랑을 가린다.
가리고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나는 엄마를 더 많이 사랑하고 싶고,
그 사랑을 마음껏 표현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엄마랑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제 와서 엄마에게 책임을 물으라거나
원망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쩄든 모든 일은 아빠가 저지른 일이다.
엄마가 조금만 더 잘 대처했다면, 
내가 덜 고통을 받긴 했을 것이다.

내가 성추행 당한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적극적으로 조치를 취했다면
나는 강간까지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지나간 일이다.
나는 그 모든 일을 겪었고,
이제 아빠는 그에 대한 죗값으로 감옥에 들어가 있다.
그리고 죄에 합당한 만큼의 형을 살고 나올 것이다.


엄마는 그 안에서 어른으로서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면 
왜 그랬는 지 그 이유라도 듣고 싶다.

뭘 했는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듣고 싶다.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
왜 알고 있었으면서도 무시했는지.

엄마는 아빠가 밤에 내 방에 들어오는 걸 수없이 많이 봤다.
하지만 지금 물어보면 기억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거짓말을 하는 건지도 궁금하다.

엄마가 보는 앞에서 내 가슴을 만지는 행동을 하는 것, 
그건 그렇게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물론 당연히 심각한 일이지만, 
잊으려고 했겠지.

아빠가 낮에 집에 온다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걸 알았어야 했다.
아빠가 나를 성추행한다는 걸 알았다면
나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더 많이 물어봤어야 한다.

아빠가 요즘은 그런 짓 안 하는지-
물어보고 물어봤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분명 엄마의 잘못도 있다.

무관심 했던 것이다.
엄마가 조금만 더 관심이 있었더라면-
엄마가 나의 편이라는 확신을 내게 주었더라면. 
나를 보호해줄 거라고 약속했더라면 
어린 나는 엄마에게 털어놓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엄마는 내 보호막이 아니었다.
엄마는 아빠의 말 한마디에 나가 떨어질 약한 방패였고,
아빠의 주먹 한 방에 깨어져 버릴 갑옷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먹은 나를 죽일 것이었다.

이게 그 때 내가 느낀 두려움이었다.



.
.



이미 모두 지난 일임은 맞다.
그래서 엄마는 그저 잊고 싶을 것이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다 묻고 그냥 살고 싶겠지.

나도 그래볼까,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아빠가 죗값을 치렀으면 됐지,
엄마까지 힘들게 할 게 뭔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엄마를 한 번 보고 와서 흔들리는 것 같다.



.
.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렇게 그냥 넘어가자,
하는 나의 생각이 나를 계속 그 집에 묶어 놨었다.

나 하나만 참으면 되는데,
그러면 모두가 행복한데.
내가 굳이 터뜨려서 모두를 고통받게 해야 하는 걸까,

정확히 이 생각이
내가 엄마에게도
경찰에게도
아빠에게 당하는 일을 털어놓지 못하게 하는 죄책감이었다.

엄마에게서 남편을 빼앗고
동생에게서 아빠를 빼앗고
아빠에게서 가정을 빼앗는
그런 느낌이 들어서,

그냥 내가 희생하고 말았던-
내가 감당하고 참고 말았던.



.
.


지금은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똑같은 실수를 또 되풀이 하는 것 아닐까.

엄마와 묵은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나의 생각이
지나친 이기심과 집착일까? 
이 정도 했으면 그냥 나머지는 묻고 살면 되는 걸까? 
고민이 된다.


.
.






다시 따뜻한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이 유혹을 참아야만 하는 건지.
두얼굴  14.05.30 이글의 답글달기

다시 엄마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셨으면 해요..
전 예전에 항상 꾹꾹 눌러담고 어떤 모욕을 당해도 남에게 피해갈까봐 용기가 없어서 담아두고 살았거든요..
그렇게 어느 한 순간 머리끝까지 차있던 모든것들이 증오심이 되서 터져버리더라구요.
엄마에게 지금 느끼는 모든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셨으면 해요.
이미 모두 끝난일이기에 지금은 말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엄마도 마음고생 심하셨을거고 하나씨도 그럴거고 두분 다 마음 아프겠지만, 한 사람은 그냥 기억속에서 지우려고 애쓰며 악몽으로 맴돌고 있을수도 있고 또 한사람은 가면 갈수록 정말로 괜찮고 괜찮은게 아닌, 아닌척이 되버릴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충분히 시간은 많고 만날 날은 많이있으니까 당당하게 기분좋게 어머니와 대화 해보셨으면 해요.
그럼 두 분에게 기분이 좋지만은 않을 수 도 있겠지만, 절대 나쁘지도 않을거에요.
마음 한켠에 그간 엉키고 설킨 밧줄을 조금씩 풀어나가셨으면 좋겠어요..
사람이라는게 남에게 피해주지말자해도 자신을 위해 모든걸 다 내려놓는다 생각하기도 하지만..
하나씨를 위해서 또 어머니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는 참는다고 해결될 일이 절대 아니라고 봐요, 하나씨가 참는다고 해서 행복해질 수 도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게 진짜 행복인건지 아니면 행복한척 하는건지 또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며 모든 상황이 다 가식같아서 섬뜩할 때도 있을거라 생각해요, 제가 약간 과장하는거일 수 도 있겠지만 제가 하나씨와 겪은 일들과는 너무 다르지만, 예전에 겪었던 일들에 대해서 저의 감정과 비슷했던 것 같아서 말씀드려봅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어찌보면 하나씨가 생각하는 것 과 달리 당당하게 어머니와 대화해서 자신이 느꼈던 감정, 궁금한 것들, 모든것들을 속내에서 숨김없이 털어놓는게 한가지 해결책일 수 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 동생과 같이 길거리를 걷는다던지.. 때로는 따뜻하게 서로가 서로를 감싸안아주면서 차근차근 하나씩 풀어나가며 진지한 대화를 나누다보면 그때 엄마가 왜그랬는지도, 어머니께서도 하나씨가 느꼈던 감정들을 그대로 받들이고 같이 아파하며 슬퍼하실꺼고 나중엔 하나씨만 혼자 속으로 끙끙앓고 담아두며 가족과 대면했을때 행복한척 하는 가정이 아닌, 진짜 행복한 가정이되서 앞으로 남은 생을 가족과 평온하게 함께 할 날들만이 가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李하나  14.06.17 이글의 답글달기

답글이 늦었지요, 차분하게 읽을 수 있게 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답니다. '모든 상황이 다 가식 같아서 섬뜩할 때', 정확해요. 제가 집에서 나온 이유, 엄마와 아무렇지 않은 듯 얼마든지 지낼 수도 있지만 일부러 거리를 둔 이유. 모두 다 저 느낌 때문이예요. 그렇게 지내는 게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행복한 척 하는 가정이 아닌, 진짜 행복한 가정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정말 그걸 바라요. 엄마는 어떻게든 이어붙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저는 제대로 붙지 않더라도 '올바로' 붙여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두얼굴님 덕분에 용기가 생겼습니다. 엄마랑 꼭 이 묵은 감정을 풀게요!

티아레  14.05.31 이글의 답글달기

하나양, 반가워요^^
엄마와 얘기하고 싶은 마음 조금도 이기적이지 않아요
당연한 거죠
엄마와 풀어야 할 숙제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앞으로 차근차근..
지금 여기까지도 이렇게 잘 헤쳐왔잖아요^^

李하나  14.06.17 이글의 답글달기

티아레님, 오랜만이예요:-) 맞아요, 차근차근. 할 수 있겠지요? 힣

좋은씨앗  14.05.31 이글의 답글달기

저도 오랜만에 반갑내요 ^^;;
하나양의 글을 읽을 때 마다 스스로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고민 하고 문제를 해결 하려는
젊은 청춘의 모습을 볼 수 있내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일생을 같이 산 가족이라 할지라도
동일한 생각과 감정을 느끼기 어렵지요
저도 추측에 불가한 생각이지만 어머니께서 그당시 어린 하나양이
딸로서 남편에게 안 좋은 일을 겪고 있을 때 어찌 해야 좋을지 고민했을 거라 생각해요

사람은 문제 앞에서 3가지 유형의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첫번째로 문제가 어려워서 포기하고 돌아서서 회피 하는 유형이 있고
두번째로는 문제 앞에서 어찌 할바를 몰라서 그 자리에 주저 앉는 사람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문제를 극복 하기 위해서 애 쓰고 풀어내는 사람 이죠

지금의 하나양이 자신의 문제를 풀기 위해 애쓰고 고민하고 힘쓰고 있다면
그 당시에 어머니께서는 어찌 할 바를 몰라서 자신의 딸과 남편의 일을
묻어 두시는 쪽으로 선택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제가 생각할때에 어머니께서 그 일로 인해서 이혼을 선택하시고
남편과 딸을 버리는 세번째 방법을 선택 하진 않으신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 일이 태어나서 처음 겪는 너무도 커다란 일이셨겠지요
그 일을 어떻게 해결 해야 할지 몰라서 였을 뿐 적어도 가정을 지켜야 겠다는
생각은 확고히 갖고 계셨다고 봅니다.

이성적인 것과 감정적인 것은 동시에 어떠한 일에 있어서 선택에 결정적 작용
요인이에요

하나양은 감정적인 부분보다는 이성적인 의지를 앞 세워서 문제를 극복 하려
애쓰는 중이에요
어머니와 관계가 회복되어 지는 것에 대한 감정적인 기대감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어머니와 자신에게 어느 정도는 거리감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충돌을 일으 키고 있는것 같습니다.

문제 해결을 우선 순위에 둘것인가 ?
아니면 가족과의 관계 회복을 우선으로 할것인가?

엄마로서 딸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것과
딸 로서 엄마를 이해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부분...
서로 간의 시간이 필요 한듯 해요 ...

분명한 것은 하나양 만큼이나 어머니께서도 이 일로 인해서
굉장히 많은 아픔과 고통 그리고 정신적 충격을 받아오셨다는 것을
하나양이 이해해 주셔야 해요

나비가 되기 위해서 애벌레가 고치를 뚫고 나오기 위해 몸부림을 치듯이
인생의 문제 앞에서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하나양을
언제나 응원하겠습니다 ^^;;









李하나  14.06.17 이글의 답글달기

오랜만이예요, 좋은씨앗님:)
맞아요, 엄마도 분명 한 사람의 피해자이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불쌍하다가도, 또 저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할 때면 밉기도 합니다. 왔다갔다 거려요:(
엄마의 속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다가도, 한 없이 답답하답니다. 이 답답함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풀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ㅎㅎ

언제나 응원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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