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재판 │ quatr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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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두 번째 재판이 있었다. 게다가 내가 법정에서 진술을 하게 되어 있어서, 더 특별했다. 친구네 엄마의 취미가 아침 일찍 온 가족을 깨우시는 거라(밥 먹으라고) 새벽에 아주 일찍 일어났다. 사실 깨우는 소리가 아무리 커도 나는 잘 자기는 하는데, 친구가 자기를 깨우는 소리에 하도 짜증을 내서 그 소리 때문에 깼다. 큰 소리는 상관없는데 짜증내는 소리에는 잘 못 자서. 아무튼, 그래서 7시도 안 되서 아침을 먹었다. 먹고 나서 산책을 했다. 요즘 오전에 삼사십분 쯤 동네를 산책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아직 완전히 습관이 되지는 않았지만, 계속 유지해서 습관으로 만들어야겠다. 물류창고가 많은 동네라, 처음에는 산책할 맛이 안 났었는데, 탐험을 하다보니까 꽤 예쁜 곳을 찾았다. 그냥 좀 높은 데에 있는 빌라가 있길래, 다리 운동이나 할 겸 올라갔는데 웬걸, 그 뒤로 예쁜 길이 나 있었다. 작은 밭들도 많고, 하우스들, 꽃나무들과 산으로 뻗어나가는 오솔길들이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그 길을 산책하고 있다. 내가 그동안 산에 다니면서 송전탑이 있어서 잘 내려오지 않던 길과 이어지는 길이다. 요즘은 산에 잘 못 간다. 친구네 가족들이 혼자서 산에 못 가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머님께서. 우리 엄마 말이었으면 안 들었겠지만, 왠지 친구네 어머님이 하시는 말씀은 듣게 된다. 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진짜 내가 걱정되서 가지 말라고 하는 마음이 느껴져서이다. 그래서 그냥 잘 안 가고 있다. 가고 싶다가도 안 가고 그냥 평지를 걷는다. 그렇게 산책을 하고 오전에 진술 준비를 조금 하다가, 씻고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버스 한 번만 타면 바로 법원에 갈 수 있기에, 그리 늦지 않게 법원에 도착했다. 친척들과 마주칠 수도 있다고 변호사님이 오자마자 본관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셨다. 자기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늘 느끼는 거지만 변호사님은 언제나 든든하다. 만나서 같이 증인대기실에 들어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주로 변호사님이 말씀을 많이 하신다. 나는 듣기만 하고. 그리고 시간이 되어 법정으로 들어섰다. 증인석으로 가서 선서를 한 뒤, 내가 준비해 간 일기를 읽었다. 그리고 아빠에게 쓴 편지를 읽겠다고 하니까, 재판장님이 피의자를 들어오게 하고 싶으면 그래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조금 생각해본 뒤에, 들여보내달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아빠가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쓴 글이었기 때문에, 조금 불편하거나 떨리더라도 아빠가 있는 자리에서 읽는게 의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아빠가 들어와 피의자 자리에 앉았다. 나는 내가 써 간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 수록, 뭔가 더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갔다. 왜 이러지? 싶을 정도로, 남은 장수가 너무 많게 느껴졌다. 그리고 별로 말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내 안에서 들끓던 것들이 차분하게 가라 앉은 기분이었다. 종잇장들을 넘기는데, '그래, 말 해 뭐하니-' 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체념,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라 그냥, 그냥 뭔가 집착하고 있던 것들을 스르르 놓아버린 느낌이었달까. 굉장히 편안했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멈춰있자, 재판장님께서 그만 해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빠를 나가게 하고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셨다.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는지, 사과 편지를 보내면 받아볼 마음은 있는지. 나는 모두 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판장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며, 해주신 말씀. 어떤 사나운 동물이나, 미친 사람이 달려들면 어쩔 수 없이 당할 수 밖에 없다고. 그런 일은 일어나는 거고, 나는 그런 사고를 당했던 거라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겁에 질려 있었고, 약했다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런 일은 일어나기도 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자책하지 말고, 수치심을 느끼지 말라고. 여기를 둘러보라고. 자신 뿐만 아니라, 검사, 공무원들, 모두 함께 있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극복하고, 앞으로도 건강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라고. 처음엔 정말 차가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말도 필요한 말씀만 딱딱 하시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겼었는데- 그런 분이 그 말씀을 해주시니까, 정말, 내 마음 속에서 너는 죄가 없어, 땅.땅.땅. 하고 무죄 판결이 내려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고소를 한 것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들을 없게 하기 위한 책임감도 있는 것 같아보인다고. 그리고 분명히 거기에 기여했다고, 라고도 말씀해주셨다. 정말 멋진 순간이었다. 이 순간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힘들었을 텐데, 증언을 해줘서 고맙다는 재판장님의 말씀을 끝으로, 나는 법정을 빠져나왔다. 변호사님을 기다렸다가 몇 가지 설명을 더 들은 뒤에 함께 법원에서 나왔다. 친척들이 와 있어서 마주치지 않기 위해 함께 돌아서 나왔다. . . 사실 처음 고소를 할 때는 좀 불안했었다. 경찰도 남자, 변호사도 남자, 판사도 남자.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한테 어떻게 말을 할까 내가 거기에 상처받지는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이 세 분께 나는 충분히 이해받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여자 선생님들과 똑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여성 분들의 그런 엄마같은 이해가 아니었지만, 이성적인 지지를 받음으로써, 나는 더욱 더 나 자신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나를 그냥 토닥토닥하기 위해, 내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게 아니라, 내가 정말 피해자고, 내 말이 진실이기 때문에 나를 믿고 지지해주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뢰가 갔던 것 같다. 객관성을 확보해주었달까. 어쨌든 두 번째 재판도 잘 마무리 되었다. 이제 두 어번의 재판이 더 있을 것이라고 한다. 내 생각보다 재판이 많기는 하지만, 이제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 . 재판이 끝나고 법원에서 나왔는데, 기분이 정말 좋았다. 홀가분하달까. 오랜만에 돌아가는 버스를 타서 이곳저곳 살펴도 보고, 공원에 가서 운동도 하고, 친구를 만나서 고기부페도 가고 팥빙수도 먹었다. 그렇게 혼자 돌아다니는 데도, 나쁜 생각이라고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좋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생각들도, 잡스러운 고민들도, 오늘 하루에 대한 곱씹음도, 전혀 없었다. 저 멀리에 점처럼 찍혀 있는 사람들까지 눈에 들어올 정도로, 오늘 나의 의식 상태는 아주 명료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내 머리 속에 가득했던 안개가 걷힌 느낌이 든다. 그동안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은 이런 느낌으로 살았던 걸까,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제라도 머리가 맑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알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앞으로도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 내가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순간순간의 느낌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버스 앞좌석에 앉아 듣던 노래, 점처럼 움직이던 논 위의 사람들, 아코디언처럼 생겨서 너무 신기했던 버스 기사의 의자, 이마를 두드리던 시원한 바람- 하루가 정말 빨랐던 오늘. 늘 오늘만 같기를. . . 간절히 바라고 노력하면 이루어진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제 알겠다. 그런 말은 늘 책에나 나오는 말이었는데, 이제 정말 알겠다. 정말 내 온 존재를 바쳐 바라고, 오로지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 반드시 이뤄진다. 나는 오래도록 오늘을 기다려왔고, 마침내 그 날이 왔다. 정말로. 기억해야지. 오늘은 나 혼자 이뤄낸 것이 아님을. 나를 도와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겠다. 나는 홀로 존재하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과 이어져 있는, 이 우주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이다. 절대로 혼자서 떨어져서는 살 수 없다. 나는 독립체가 아니라, 유기체다. 네가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네가 있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안에 존재하는 작은 사람. 앞으로도 이걸 기억하면서 살아야겠다. . . 민사소송에는 조금 문제가 생겨서 위자료나 배상금을 못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앞으로 힘내서 살아야겠다. 사실 돈은 받을 생각도 없었는데 뜻밖에 위자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기대해본 것이지, 원래 벌어서 살 생각이었다. 그리고 엄마네 집에서 살았어도 어차피 학비랑 생활비는 내가 다 알아서 했었다. 있을 곳만 마련하면 전이랑 달라질 것은 없다. 인생의 2막이 열리는 듯한 느낌이다. 1막에서 배웠던 것들로, 잘 살아봐야지. 작고 가까운 것들에 집중하면서. 오늘을 소중히 여기고, 안 좋은 것보다는 좋은 것을 많이 보고,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사랑하며, 느끼며, 표현하며, 믿으며.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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