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은 왜 편하게 죽음을 맞이할까?   2014
  hit : 2617 , 2014-12-16 11:37 (화)
(죽기전에 꼭 읽어봐야할 글) 
의사들은 왜 편하게 죽음을 맞이할까?


몇 년 전 평판이 상당히 좋은 정형외과 의사면서 
나의 친구이기도 한 찰리가 위에서 종양을 발견했다. 
그는 그 부분을 외과 진찰하였다. 
진단은 췌장암이었다. 
담당 외과의는 최고 명의 중의 한 분이었다. 
그 외과의는 바로 이런 암 환자의 
5년 생존 가능성을 5%에서 15%로 
3배나 늘릴 수 있는 
-비록 삶의 질은 나쁘지만 –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찰리는 심드렁했다. 
그는 다음날 병원 문을 닫고는 집으로 가서 
다시는 병원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 주력하면서 
가능한 기분 좋게 지내려 하였다. 
몇 개월 후 그는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화학요법도 방사선요법도 
외과 치료도 하지 않았다. 
그는 병원 치료에 많은 돈을 쓰지 않았다. 
자주 다루는 주제는 아니지만, 

의사들 역시 죽는다. 
그리고 의사들은 우리들처럼 죽지 않는다. 
대부분의 미국인들과 비교해볼 때 특이한 것은 
의사들이 얼마나 치료를 많이 받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적게 받는가 하는 점이다. 

의사들은 평생을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살아왔지만 
자신들의 죽음에 직면해서는 꽤 평온한 경향이 있다. 

그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고 
어떤 선택들이 있는지 안다.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의료 치료는 
일반적으로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점잖게 떠난다. 
물론 의사들도 죽고 싶지 않아 하고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은 현대 의학을 잘 알고 있고 
그 한계도 알고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고통 속에서 홀로 죽어가는 것임을 알 정도로 
죽음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점을 두고 
의사들은 가족들과도 함께 얘기를 해왔다. 
그들은 때가 되면, 
어떤 영웅적인 조치도 취해지지 않기를 
분명히 해두고 싶어한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가 자신을 심폐소생술(CPR)로 살리기 위해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일을
(심폐소생술을 제대로 하면 일어나는 일) 
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길 원한다. 

거의 모든 의료전문가들이 사람들에게 행해지는 
소위 “헛된 치료”를 목격해 왔다. 
의사들이 임종에 이른 중환자들에게 
첨단기술을 사용하면서 하는 치료가 그것이다. 
환자는 수술을 받고 튜브를 삽입하고 
기계에 매달려 약물 세례를 받는다. 
이 모든 것이 하루에도 수만 달러의 비용이 드는 
중환자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 돈으로  얻는 것은, 
비참함이다. 

동료 의사들이, 말은 조금씩 다르지만, 
얼마나 자주 내게 이런 얘기를 했는지 모른다. 

“내가 만약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되면 
차라리 나를 죽여주겠다고 약속해 줘.” 

어떤 의료인은 자신에게 
심폐소생술(CPR)을 하지 말라고 새긴 
메달을 갖고 다닌다. 
나는 심지어 문신으로 새긴 사람도 보았다.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의료처치를 한다는 것은 고민스런 일이다. 
의사들은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정보를 모으도록 훈련을 받아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있으면 
“가족들이라면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토로할 것이다. 

나는 의사들이 다른 분야 전문가들보다 과음하고 
우울증 비율이 높은 이유 중의 하나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환자들을 돌본 지난10년 동안, 
내가 병원 처치에는 참여하지 않은 데에는 
그러한 이유도 있었다. 

어떻게 의사들은 
스스로에게는 원하지 않은 치료를 
사람들에게 그렇게 많이 행할 수 있는가? 
단순하지만, 또는 그리 단순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해답은 이것이다. 

환자, 의사 
그리고 시스템에 있다.  

환자들이 하는 역할을 알기 위해서 
누군가 의식을 잃고 응급실에 실려온 장면을 떠올려보라. 
너무나 흔한 일이지만 
누구도 이런 상황을 계획한 것이 아니다. 
충격을 받고 놀란 가족은 미궁과도 같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주눅들어 있다. 
의사가 “모든 것”을 하기를 원하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좋다고 대답한다. 
그리고는 악몽이 시작된다. 
때때로 가족이 “모든 것을 해달라”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종종 
“합리적인 모든 것을 해달라”라는 의미이다. 

문제는 무엇이 합리적인 것인가를 
그들이 모른다는 점이다. 
또한 그들은 혼돈스럽고 슬픈 나머지 
그런 것을 묻지도 못하고 
의사가 해줄 수 있는 말을 듣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하겠다고 말한 의사들로서는 
그게 합리적이든 아니든 간에 그렇게 할 것이다. 

이상의 시나리오가 흔히 있는 일이다. 
이 문제를 심화시키는 것은, 
의사들이 해낼 수 있는 것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폐소생술을 
의지할만한 구명조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대개 그 결과가 좋지 않다. 
응급실에 있을 때 나는 심폐소생술을 거친 후 
내게 데려온 수백 명의 환자를 보았다. 

딱 한 사람, 전혀 심장 문제가 없었던 
건장한 남자만(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긴장성 기흉”이었다)
병원을 걸어서 나갔다. 
만약 중병이면서 나이가 많거나 말기환자라면 
심폐소생술로 좋은 결과가 나오기가 극히 어렵다. 
오히려 고통을 겪을 가능성이 압도적이다. 

지식의 부족과 잘못 방향 잡은 기대가 
많은 그릇된 결심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일들을 
환자만 하는게 아니다. 
의사들도 권한 있는 역할을 한다. 
어려운 점은, 헛된 치료를 행하기 싫어하는 의사조차도 
환자와 가족들의 소원을 들어줄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응급실은 히스테리 가능성이 있을 수 있는, 
슬픔에 젖은 가족들로 차 있다. 이들은 의사를 모른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뢰와 믿음을 구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떤 의사들은 다른 의사들보다 
커뮤니케이션에 능하다. 
또 어떤 의사들은 매우 단호하다. 
그러나 의사들이 직면하는 압박감은 비슷하다.

나는 임종시 선택을 해야 하는 환경에 처했을 때, 
내 생각에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안만, 
가능한 치료 초기에 제시하는 방법을 취했다. 
환자나 가족들이 비합리적인 선택을 제기했을 때 
나는 일반인들이 알기 쉬운 용어로 
그 이면을 분명히 설명해주곤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의미 없거나 해로운 처치를 
환자나 가족이 계속 고집한다면, 
다른 의사를 소개하거나 
병원을 옮기도록 제안하곤 했다. 

때때로 내가 더 강한 입장을 취했어야 했을까? 
내가 이전(移轉) 조치를 내린 결정 중 몇몇은 
아직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환자 중의 한 분은 
명문 가정의 변호사였다. 
그녀는 당뇨가 심했고 순환계가 좋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땐가 
발에 고통스런 상처가 심해지게 되었다. 
병원의 위험에 대해 알고 있던 나는 
그녀가 수술을 피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전문가들을 찾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 나만큼 알지 못하는 전문가들은 
만성 폐색을 일으키는 두 다리에 
바이패스(우회) 수술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수술은 혈액순환을 회복시키지도 않았거니와 
수술한 상처도 치유되지 않았다. 
그녀의 발은 썩어 들어갔다. 
그녀는 두 다리 절단 수술을 해야만 했다. 
2주 후,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그 유명한 병원에서 그녀는 사망했다. 

물론, 의사 혹은 환자의 잘못된 판단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당사자보다 과잉 진료를 권장하고 있는 
더 큰 원인-시스템의 희생자일 뿐이다. 

어떤 불행한 경우에는, 
의사들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기 위해 
“진료행위별 지불” 모델을 이용한다. 
그것이 아무리 의미가 없다 할지라도 
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더욱 일반적인 것은, 
의사들은 소송이 두려워 
요청되는 것은 뭐든지 한다는 것이다. 

거의 피드백도 주지 않으면서 
곤경에 빠지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절차를 제대로 했다 하더라도 
시스템은 여전히 사람들을 삼킬 수 있다. 

내 환자 중의 한 분은 
잭이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78세인데 몇 년 동안 병을 앓았고 
15차례나 큰 수술을 받았다. 
그는 나에게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다시는 생명 연장 장치에 맡기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느 토요일 
잭은 심한 뇌졸중으로 의식을 상실한 채 
아내도 없이 응급실에 실려갔다. 
의사들은 그를 소생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했고 
그를 중환자실에 입원시켜 생명 연장을 하였다. 
이는 잭에게는 너무나 나쁜 악몽이었다. 

내가 병원에 도착하여 잭을 담당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의 당부가 적힌 내 사무실 노트를 가지고 와서 
그의 아내와 병원 스태프에게 말했다. 
그리고 생명 연장 장치 가동을 멈추고는 
그의 옆에 앉았다. 
그는 두 시간 후 사망했다. 

잭은 자신의 소원을 문서화했지만 
희망한 대로 죽지 못했다. 
시스템이 관여했던 것이다. 
간호원 중의 한 분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잭의 생명연장 장치를 뽑았기에 살인 가능성이 있다며 
당국에 보고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 이후 아무런 일은 없었다. 
잭의 소원은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잭은 그것을 증명하는 서류도 남긴 것이다. 

그러나 예상되는 경찰 조사는 
어떤 의사에게도 공포스럽다. 
내가 쉬우려면 잭의 소원에 반하여 
그를 생명 연장 장치에 맡겨두어 
그가 몇 주 더 고통을 받게 할 수도 있었다. 
아마 나는 돈도 더 벌었을 것이고 
의료비로 50만 달러 정도가 청구되었을 것이다. 
많은 의사들이 과잉치료의 측면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의사들은 
그래도 자기 스스로를 '과잉치료'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결과들을 끊임없이 보고 있다. 
누구나 집에서 평화로이 죽는 방법을 찾을 수 있고, 
통증도 이전보다 더 잘 다스릴 수 있다. 

헛된 치료를 하기보다 
임종 환자들에게 편안함과 존엄성을 제공하려고 
애쓰는 호스피스 간호는 더 나은 임종을 맞게 한다. 
연구에 의하면 놀랍게도 호스피스 간호를 받는 환자는 
적극적인 간호를 찾는 같은 질병의 환자에 비해 
더 오래 산다는 것이 밝혀졌다. 

나는 최근에 라디오에서 
유명한 리포터 탐 위커가 
“집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감사하게도 그러한 얘기들은 점점 흔하게 들리고 있다. 

몇 년 전 나의 사촌형 토치가 
발작이 왔는데 폐암이 뇌로 번진 것임이 판명되었다. 
나는 그에게 여러 전문의를 주선해 주었다. 
우리는 화학요법을 위해 
일주일에 3-5회 병원 방문을 하는 등 
공격적으로 치료하더라도 
4개월 정도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토치는 어떤 치료도 거부하고 
뇌 부종 약만 복용하였다. 
그는 이사하여 나와 함께 지냈다. 
우리는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8개월을 지냈다. 
수십 년 동안 누리지 못했던 즐거움을 함께 누리면서. 
우리는 디즈니랜드에 갔는데 그는 처음이었다. 
우리는 집에서 놀았다. 그는 스포츠 팬이었다. 
내가 해준 요리를 먹으며 
스포츠 보는 것을 너무나 좋아했다. 
그는 심한 통증이 전혀 없었고 늘 활기가 넘쳤다. 
어느 날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삼 일 동안 뇌사상태 환자처럼 잠을 자더니 
세상을 떠났다. 

8개월 동안 그의 의료비용은 
복용하고 있던 약값뿐이었는데 20달러에 불과했다. 

토치는 의사가 아니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은 
삶의 양이 아니라 삶의 질임을 알았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지 아니한가? 

만약 최첨단 임종 간호가 있다면 그건 바로 존엄사이다. 
나로서는 내 의사가 나의 선택이다. 
그들은 대부분의 의사들에게 하듯이 쉽게 해줄 것이다. 
어떤 영웅적인 것도 없이 
그저 굿나잇의 세계로 나는 점잖게 떠날 것이다. 

찰리처럼. 나의 사촌 토치처럼. 
그리고 나의 동료 의사들처럼...


“타임” 誌 2014. 9. 2일호에 게재된 이 글의 저자 
켄 머레이(Ken Murray)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 가정의학과 임상조교수이다. 

원제 : Why Dying Is Easier for Doctors
번역 : 고재섭

출처 : http://time.com/author/ken-murray/

向月  14.12.16 이글의 답글달기

저.. 서류 썼어요. 생명연장하겠다고, CPR 하거나, 부러 산소호흡기달고, 진통제를 놓으며,
내가 의식을 놓으려할때, 억지로 내게, 그런 방법을 쓰지 말라구...
남은 자들에게는 생명연장이고, 조금이라도 죽어가는 이를 잡고 싶어하는 마음이겠지만,
떠나는 자에겐 그건.. 잔인하고 더 큰 고통의 연장이라는거.

그냥, 갈 때는... 편안하게 가고 싶어요.

무아덕회  14.12.16 이글의 답글달기

저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요.

프러시안블루  14.12.16 이글의 답글달기

항상 좋은 글 잘보고 있습니다.

무아덕회  14.12.18 이글의 답글달기

잘 봐주셔서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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