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불안   cinq.
  hit : 2242 , 2015-08-30 00:03 (일)



나는 평소에,
초등학생 때의 내 성격을 그리워하곤 했다.
거침이 없고
싫은 건 싫고 잘못된 건 잘못 됐다 말하고,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성격이었다.

남자 아이들을 이끄는 걸 좋아해서
같이 놀 때도 늘 두목 역할을 맡고-

반에서 무슨 결정할 일이 있으면
여자애들은 꼭 나에게 먼저 물어보러오곤 했다.

초등학교 5학년 정도까지는 
그런 성격이었던 것 같다.

반에서 인기도 제일 많았고,
무엇을 하든 잘했다.
공부, 운동, 미술, 등등.

그런데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고학년, 특히 5학년이 되면서
우리들끼리의 세상이 끝나고
선배들의 간섭이 시작됐다.

어느 날 모두 선배들에게 존댓말을 쓰라는 지령이 내려왔는데
나는 정말 터무니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태도가 전해졌는지
언니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고
툭하면 불러서 
'야리지 말아라'거나 '눈 깔아라' 등등의 말을 하곤 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는
알겠다고 했지만 
별로 신경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나는 자신감을 잃어갔다.
6학년이 되자 
나는 못 생기고 나대는 아이가 되어 있었고
예쁘고 언니들에게 인기 많은 친구들이
더 잘 나갔다.

6학년 때 같이 다니던 친구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왕따인 아이들과 같이 놀던 때도 있었다.
새로 왕따가 아닌 친구를 사귀었지만
그 땐 정말 충격적이었다.

사실 그 때는 누구든 돌아가면서 왕따가 되기도 해서
정말 존재감이 없는 아이가 아니면
한 번쯤은 왕따를 당하곤 했다.



.
.

그러다가 중학생이 되었다.
입학식 전 날,
침대 위에서 하던 생각이 아직도 기억난다.

내일 학교에 가서 친구를 한 명도 못 사귀면 어떡하지,
중학교에 가서 왕따가 되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들에 잠을 이루지 못 했다.

사실 이 때까지는 
그냥 일반적인 고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면서
나는 초등학생 때와는 다른 상황에 직면해야만 했다.

정말 내가 제일 잘 나가고
인기가 많았던 옛 시절은 어딜 가고,
나는 못 생기고 찌질한 축에 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말 예쁜 아이들,
그리고 언니들에게 인기가 많은 아이들이 주류였고
나 같은 건 그 축에도 못 꼈다.

그 상황이 나는 너무 충격적이었나보다.
한 동안은 친구를 사귀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점점 성격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사람을 피하고 공부만 하기 시작했고,
그런 나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친구들은 인생에 도움이 되는 몇 명만 있으면 되,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인사를 하지 않을 거야-

화장?
인기?
다 필요 없어.
너네는 어려서 그래.


그리고 나는 너희보다 생각이 우월하기 때문에
지금부터 책을 읽어서 큰 일을 할 거야.


.
.


내가 그 때 왜 그랬을까,
라는 생각을 늘 많이 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활발하던 아이가
갑작스럽게 사람을 피하게 된 이유.
뭘까.

고등학교 때는 더 심했다.
남자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책만 봤다.
공부만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나를 대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찌질해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책을 읽으면
친구들은 멋있다고 했다.
나처럼 공부를 잘 하고 싶다고.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 하는 건 
좋은 덕목이었다.

그 뒤에 숨어
나는 열심히 사람을 피했다.
내 앞에서 친구들이 열심히 대화를 하면
나도 거기에 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서
책만 읽곤 했다.
책에 엄청 집중하는 척.


누가 말을 걸어도
다리를 꼬고 앉아서
내가 할 일에만 집중을 하곤 했다.

그런 모습들에 친구들은
'시크하다'라고 말해주면
나는 잘 포장된 나의 회피에,
만족하곤 했다.


하지만 신기한 건,
그러면서도 사회 활동을 아예 안 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기숙사에 살면서 친구들과 거의 가족처럼 지냈고,
여자애들한테는 인기가 많았다.
남자애들한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동아리도 두 개나 들었었다.
그리고 그 두 동아리 모두 회장을 맡았다.

반에서는 체육 부장이며 부반장이며 임원도 열심히 했고.

그렇게 앞에 나서는 걸 무서워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게 역할이 주어지면
아이들을 잡는 일은 잘 했다.
청소 반장이라든지-

그런데 개인적인 관계에 정말 서툴렀다.
이야기하고 있는 친구들 틈에 가서 끼어들기.
내게 말 거는 친구들과 대화하기, 등등.
그게 그렇게 안 됐다.


.
.

대학교 입학 후,
첫 학기까지 그랬던 것 같다.

극적으로 변했던 건
처음으로 갔던 동기 엠티에서
친구들과 친해지면서-
그리고 해외 봉사를 다녀오면서다.

그러면서 이제는 사람들과 잘 지내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뭔지 모를 어색함과
수줍음, 그리고 그것에 대한 회피가 남아 있어서
답답할 때가 있다.

그 뿌리는 학창 시절에 있다고 생각해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인데,
이번에 빌려온 책에서 그 실마리를 조금은 찾았다.

책의 제목은
'사람들 앞에 서면 나는 왜 작아질까'이다.

회피성 인격 장애,
에 대해서 나오는데
그 요소들이 중, 고등학교 때 내가 보였던 행동 패턴과 비슷하다.

사람들을 피하고,
그 행동들을 적당히 합리화 한다.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나는 1등을 할 거야, 친구를 많이 사귈 필요는 없어, 
나는 화장 같이 꾸미는 건 관심 없어 등)

그리고 이성과의 관계를 특히 불편하게 여긴다.
특이한 건 나는 대중 앞에 나서는 걸 두려워한 적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나는 대중 앞이 편했다.

무대에 올라가서 공연하기,
반 회의 진행하기,
동아리 이끌기 등등은 잘했다.

뭔가 나에게 직책이 주어지면 편했던 것 같다.



.
.


어쨌든 초등학교 고학년을 넘으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이런 행동 유형들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고,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 지 궁금하다.

전에는 내가 그냥 성폭행 때문에 우울해서
사람을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왜냐하면 학교에서의 일들도 분명 영향을 미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쩄든 이 사회 불안으로 
학창 시절의 내 대인 관계에 대해 파악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수줍음'과 관련해서.
나는 외가 친척들 사이에서도 수줍음을 많이 탔다.

학교, 그리고 친척들.
그 관계에 내 수줍음과 위축, 그리고
회피에 관련된 답들이 있을 듯 하다.


이 책을 좀 더 깊이 읽어보면서
파봐야겠다.
왜냐하면 나는 좀 더 자유롭게 관계를 맺으면서 살고 싶으니까! 

그리고 중고등학교 친구들을 좀 더 자유롭게 만나고 싶고,
외가 친척들을 상대로도 수줍음을 덜 타고
자신감을 갖고 싶으니까.


.
.


함해보자  15.09.03 이글의 답글달기

청백님은 자기자신에 대해 정말 잘알고 계시네요. 글도 보고있으면 묘하게 빠져드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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