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한국 문학에 관심을 갖고 어쭙잖은 평론 비슷한 것을 몇 편 쓴 적도 있지만, 최근 몇 년간 나는 한국 문학에는 관심이 없었다. 문학 비평 이론을 가르치는 영문과의 대학 선생이 되었고 내게 주어진 선생으로서의 여러 일들을 감당하기에도 정신이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내 나름의 판단으로 한국 문학의 활기가 사라졌다고 느꼈던 것도 곁들인 이유였다.
한국 문학은 그렇게 내게는 '너무 멀어진 당신'이 되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다시 문학 연구 모임 비슷한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한국 문학을 좀 더 가까이 하게 되었다. 한국 문학 전공자들과 나 같은 외국 문학 전공자들이 섞여 있는 모임의 성격상 한국 문학을 바라보는 여러 시각이 그야말로 중구난방 격으로 쏟아져 나오는 모임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중구난방 속에서 한국 문학 전공자들이나 비평가들은 언급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한국 문학의 징후들을 조금은 깨닫게 되었다.
여러 얘기가 가능하겠지만 그동안 많이 언급되어온 '주례사 비평' 혹은 '정실 비평'의 폐해를 실감하게 된 게 그 중 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주례사 비평'의 이론적 의미 따위를 논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한국 문학 비평가나 연구자들이 따져야 할 몫이리라. 다만, 외국 문학이긴 하지만 어쨌든 문학 작품과 비평 이론을 가르치는 문학 선생인 내가 보기에도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작품들이 평론가들에 의해 높이 평가받고 있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하나의 예만 먼저 들고 싶다. 현기영의 장편소설 <누란>(창비 펴냄)이다. 나는 어지간하면 읽기 시작한 작품은 끝까지 읽는 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끝까지 읽기가 고통스러웠다. 그만큼 엉망이었다. 현기영이 중견 작가이기에 그만큼 더 환멸감이 컸다. 여러 말이 가능하겠지만 내가 읽은 소감 몇 마디만 적자.
이 작품은 소설이 아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가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해주는 '인형'들이다. 살아있는 인물들이 아니다. 그러니 사건도 필요 없다. 사건이 있어 보이지만 있으나 마나한 사건들이다. 사건의 필연성이나 서사의 필연성도 없다. 그리고 작품의 주제 의식에서 뭔가 새로운 걸 배우지도 못한다. 작가가 각 등장인물들, 특히 주인공 허무성을 통해 하는 얘기들이 독자에게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것도 아니다. 꼼꼼하게 읽지 않더라도 대충 아는 얘기들이다. 어떤 부분은 읽기가 민망할 정도로 상투적이다. 인물들이 하는 말들이 내용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굳이 작가가 할 말을 그런 인물을 통해 얘기해야 하는 서사적 논거가 작품에 전혀 없으며, 그 말들이 새로운 인식이나 깨달음을 주지도 않는다.
혹시 작가는 1970년대, 80년대를 경험했던 나 같은 중년층이 아니라 그 시절을 모르는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훈계'의 말씀을 전해 주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작품에는 허무성과 학생들이 나누는 지루한 대화 혹은 논쟁이 길게 실려 있다. 역시 재미없다. 각 시대는 각 시대 나름의 시대 경험의 양상이 있다. 그걸 무시하고, '너희는 왜 그렇게 사는가'라고 떠들어봐야 작품에 나온 표현대로 "꼰대" 짓에 불과하다. 작가가 "꼰대"가 되어서는 곤란하며, 하물며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서는 더욱 곤란하다. 오히려 작가는 "꼰대"질의 냉철한 비판자가 되어야 한다. 작가는 이렇게 적는다.
"절망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철저하게 절망하여 그 밑바닥에 닿으면 거기에서 새로운 정신,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고 그때 우리는 바닥을 걷어차고 힘차게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누란>, 300쪽)
멋진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정도의 "절망"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런 절망을 통해 "새로운 정신, 새로운 자아가 탄생"할 걸로 여긴다면 큰 착각이다. 나는 이런 수준의 작품을 출판한 것은 작가의 큰 실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품의 뒤에 붙인 추천의 말씀들은 듣기 민망할 정도이다. 이 소설이 "오래 아픈 사람들에게 깊은 안식을 줌은 물론 좋은 약이 될 것이 틀림없"단다. 나로서는 작품을 읽고서나 쓴 추천사인지 의심스럽다. 조심스러운 짐작이지만, 이런 질 낮은 작품을 나름의 명망을 지닌 출판사에서 낸 것은 작품의 '질'에 대한 엄격한 판단이 아니라 그동안 출판사와 작가가 쌓아온 '정실' 때문이리라. 한마디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정실주의'가 문학 판에도 자리 잡은 게 아닐까. 나는 환멸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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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신경숙. ⓒ백다흠
물론 이런 나의 독서 실감이 틀릴 수도 있다. 전문적으로 한국 문학을 읽고 분석하는 현장 비평가들은 다른 평가를 할 수도 있다. 그들이 보기에는 <누란>이 훌륭한 작품일 수도 있다. 필요한 것은 그렇게 평가하는 근거일 뿐이다. 그리고 단지 한편의 작품만을 갖고 한국 문학계의 '정실주의' 운운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그런 식의 단정을 내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엄밀히 말해 비평의 객관성은 없다. 모든 읽기와 비평은 주관적이다. 비평의 객관성은 독자와 비평가들이 표현하는 다양한 주관적 견해들 사이의 대화와 논의를 통해 서서히 형성될 뿐이다. 영문학 연구자로서 내가 신뢰하는 비평가 중 한 명인 리비스(F. R. Leavis)가 비평의 키워드로 내세운 '공동의 모색(the common pursuit)' 개념을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비평의 객관성은 시민적 양식을 지니고 독서의 훈련을 거친(그래서 인문 교육이 중요하다) 독자 대중과 비평가들의 주관성들이 만나 어떤 객관성, 그러나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화하고 새롭게 형성되는 객관성을 형성하는 '공동의 모색'이다.
그러나 이런 공동의 모색에는 전제가 있다. 비평가가 비평가다워야 한다. 이 말은 분명 동어반복이다. 그러나 나의 독서 실감과 너무나 판이한 판단을 내리는 적지 않은 작품 평을 읽으면서 든 생각. 한국 비평이 비평의 본령인 비판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평소에 신뢰해 온 예민한 비평가조차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문학에 나름의 관심과 애정을 지닌 독자이자 외국 문학 연구자로서 나는 그 점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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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서두가 길었다. 우선 내가 읽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이하 <전화벨>, 문학동네 펴냄)에 대한 몇 가지 단평을 적겠다. 그리고 내가 앞서 언급한 비평가들의 '정실주의'와 '주례사 비평'의 몇 가지 사례를 다뤄보겠다. 그리고 왜 그런 '정실주의'가 작동하는지 그 이유를 나름대로 '추리'해보겠다.
나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이하 <엄마>, 창비 펴냄)와 <전화벨>을 앞서 언급한, 내가 참여하는 어느 문학 연구 모임에서 읽었다. 이 작품들이 모임에서 추천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그 이유가 무엇이든 대중들의 관심을 모으는 베스트셀러라는 것. 둘째, 작가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명으로 꼽히는 신경숙이라는 것. 내 소감을 당겨 말하자. 두 작품 모두 나는 실망스럽다고 느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두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좋게 평가해온 작가가 '성숙'의 길이 아니라 '퇴락'의 길을 걷는 게 아닌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 두 편의 작품을 그가 쓴 다른 장편인 <외딴 방>(창비 펴냄)이나 <깊은 슬픔>(문학동네 펴냄)과 비교해도 그렇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몇 편의 관련 평론을 찾아 읽었다. 그러나 그런 평론들은 내 궁금증을 해명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부채질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실 비평'의 문제와 관련하여 뒤에 다시 논의하겠다.)
내가 보기에 신경숙은 본격 문학과 대중 문학의 경계(그 경계의 근거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하지 않겠다)에서 이제 대중 문학으로 완연하게 넘어갔다. 이것은 가치 판단이 아니라 사실 판단이다. 다시 말해 나는 대중 문학을 폄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대중 문학의 가치를 십분 인정하며 실제로 대중 문학의 다양한 장르 문학들을 즐겨 읽는다. 다만, 각자의 소임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작가가 실제로는 대중 문학을 하면서 자신이 본격 문학을 하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그 점에서 일본 문학계에 던졌던 가라타니 고진의 아래와 같은 조언은 지금의 한국 소설계에도 유효하다. 그렇게 한국은 일본을 따라가고 있다.
"나는 작가에게 '문학'을 되찾으라고 말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또 작가가 오락 작품을 쓰는 것을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 열심히 잘 써서 세계적인 상품을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만화가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 그것이 가능한 작가는 미스터리계 등에 상당히 있습니다. 한편, 순수 문학이라고 칭하고 일본에서만 읽히는 통속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잘난 척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가라타니 고진, <근대 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비, 65~66쪽)
나는 가라타니의 지적을 이렇게 읽고 싶다. "순수 문학이라고 칭하고 한국에서만 읽히는 통속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잘난 척을 해서는 안"된다. 신경숙의 많은 애독자들은, 신경숙 문학을 내가 자의적으로 대중 문학으로 폄하하는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엄마>나 <전화벨>은 분명 본격 문학보다는 대중 문학에 가깝다. 대중 문학과 본격 문학 사이에 만리장성이 놓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점도 있다.
그 중 하나. 대중 문학은 대중이 좋아할 만한 감수성에 호소하고 영합한다. 그러나 본격 문학은 대중의 감수성에 충격을 주고 불편하게 만든다. 작가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대중의 감수성에 충격을 주고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대중의 감수성에 영합할 때, 그래서 얄팍한 인기를 얻고 책이 많이 팔리는 것에 만족할 때 작가는 통속 작가가 된다. 본격 문학과 대중 문학 사이에 만리장성이 없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작가가 항상 긴장을 잃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내가 보기에 신경숙은 그런 긴장을 잃고 있다. 이게 단지 까칠한 독자의 투정일까?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빌려 한국의 베스트셀러 작가들에게 던지는 나의 까칠한 투정의 변명을 삼고 싶다.
"<노르웨이의 숲>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는, 이것은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상상을 넘어선 판매고에 나름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1Q84>는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작업이고, 내용에 보람도 있었습니다. (…) 소설에게 가장 중요한 점은 시간에 의해 검증받는 것입니다. 시간의 혹독한 세례를 받는 것." ( '인터뷰 : 하루키를 말하다,' <문학동네> 64호(2010년 가을), 533쪽)
간단히 말해 제대로 된 본격 문학 작가라면 자신의 작품이 많이 팔린다면 마냥 기뻐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혹시 자신의 작품이 대중의 감수성에 충격을 주기는커녕 영합하는 것이 아닌가? 거기서 작가의 길이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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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문학과 대중 문학의 경계를 나누는 근거가 무엇인지 굳이 말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런 근거 중 하나는, 역시 애매한 말이지만, 현실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냉정함, 무자비함, 냉철함이다. 내가 이해하는 글쓰기의 '유물론'이다.
작가가 견지하는 시선의 냉철함은 <엄마>나 <전화벨>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는 신경숙 소설의 전매특허인 아름답게 포장된 미문의 '감상성'과는 거리가 멀다. 문체는 곧 사유의 표현이다. 신경숙 문체에서 때때로 느낄 수 있는 느끼할 정도의 아름다움은 그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표현이다.
신경숙 소설은 기본적으로 '천사표'이다. 생활인으로서 작가가 '천사'인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작품에 드러나는 작가의 '정신'이 천사의 시각에 머문다면 심각한 문제이다. 내가 아는 훌륭한 작가들은 적어도 그들의 작품에서는 천사가 아니라 악마에 가깝다. 우리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느끼는 일이지만, 인간의 삶은 천사가 아니라 악마에 가깝다. 삶은 때로 아름답지만, 훨씬 더 자주 추하고, 혐오스럽고, 잔인하고, 역겹고, 위선적이고, 동물적이다.
그래서 작가는 인간의 그런 악마적 심성, 마성에 친숙해야 한다. 그걸 모르고서는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다. 되풀이 말하지만, 이런 판단은 생활인으로서의 작가가 아니라 작품에 드러난 작가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나는 작가 개인의 성품이 천사표인지 악마표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것은 비평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신경숙 소설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악한'이 없다. 모두가 선하다. 이것은 비단 신경숙 소설만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읽은 최근의 한국 소설에서 나는 제대로 된 악한을 만난 적이 없다. (오히려 최근 한국 영화에서 그나마 '악한'들을 만난다.)
나는 이 점이 한국 소설이 처한 곤경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라고 판단한다. 되풀이 말하지만 인간은 천사보다는 악마에 가깝다. 인간은 모순적이고, 균열적이고, 위선적이다. 아무리 선해 보이는 인간도 그 내면에는 악마가 살고 있고, 아무리 악해 보이는 인간도 그 내면에는 한줌의 선함이 존재한다. 그게 인간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애초에 '선'과 '악'의 구분조차 그렇게 손쉽게 나뉘지 않는다. 일급의 작가들은 주어진 '선'의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 '선'이라고 주어진 것들이 과연 선한 것인지를 좋은 작가들은 따지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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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신경숙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전화벨>은 후일담 소설이다. 작품의 시간은 1980년대이고, 공간은 대학과 그 언저리이다. 이 작품의 공간과 시간은 나에게 낯익다. 나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인 윤이와 단이와 미루와 명서, 미래 등에 다른 누구보다 나는 공감을 할 만한 위치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작품을 읽으면서 등장인물에 대해 나는 공감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궁금하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나의 동세대들은 이 소설을 어떻게 읽을지.)
작가는 이 작품을 후일담 문학이 아니라 일종의 성장 소설, 혹은 "청춘 소설"로 썼다지만, 후일담 문학이든 청춘 소설이든 핵심은 그들이 겪는 고통, 방황, 죽음, 성장의 깊이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나는 아름답게 찍은 예술 사진이 연상되었다. 고통스러운 삶의 모습을 찍어 멋진 사진틀에 넣어서 우아한 공간에서 전시되는 예술 사진. 대개 그런 예술 사진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은 '감동'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것은 반응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어떤 관객은 그런 예술 사진을 볼 때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런 사진들이 보여주는 내용과 형식의 부조화에서는 재현(representation)의 윤리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사진작가가 아름답게 '재현'하는 것은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가? 더 강하게 표현하면, 그런 재현 행위는 어느 선까지 '예술'의 이름으로 용서될 수 있는가? 나는 여기서 재현의 불가능성을 옹호하는 게 아니다. 신경숙이든 누구든 그만의 방식으로 그들이 겪은, 불같은 '청춘 시절'을 회고하고 재현할 수 있다. 다양한 현대 비평 이론이 밝혔듯이, 모든 예술적 재현 행위는(그것이 문학이든, 사진이든, 그림이든) 그 본성상 불가능한 시도이다. 어떤 예술 작품이 실제 현실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가?
하지만 훌륭한 예술 작품은 재현의 불가능성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한다. 그래서 냉철해진다. 자신이 묘사하고 서술하는, 고통 받는 대상에 대해서나 그런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에 대해서나 한 치의 감상도 없이 무자비할 정도로 냉정하다. 그런 냉철함에 감상성이나 센티멘털리즘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어떤 훌륭한 예술 혹은 문학 작품치고 감상성에 사로잡힌 작품은 없다. 나는 소위 '리얼리즘'의 정신을 무자비한 냉철함으로 우선 이해한다. 모든 위대한 작품들은 무자비한 냉철함의 리얼리즘을 표현한다. 그것이 '양식'적으로 사실주의이든, 모더니즘이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냉철한 리얼리즘, 혹은 유물론의 '정신'이다. 신경숙의 <엄마>나 <전화벨>은 그런 작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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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은 신경숙 소설의 미덕으로 흔히 꼽혀온 요소들이 냉철한 '악마'적 현실 감각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을 때 어떻게 작품을 해칠 수 있는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신경숙은 그만의 고유한 문체를 가진 드문 작가이다. 그런 문체의 가치를 나는 십분 인정한다. 문학은 무엇보다 글의 예술이다. 그의 문체는 서정적이고 섬세하다. 그래서 때로는 감상성의 위험에 빠진다. 감상적 문체가 그가 그리는 대상에 대해 냉정하고 냉철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할 때, 현실을 관념으로, 관념을 전달하는 유려한 문체로 덮어버리게 된다. 아름답고 감상적인 문체가 효과적일 때도 있다. 하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이 작품에 많은 고통이 그려지지만 많은 묘사들이, 적어도 내가 읽기에는 실감나는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신경숙은 고통을 고통스럽지 않게, 아름답게만 그린다.
나는 하나의 예로 언니 미래의 '투신'을 길게 묘사하는 미루의 설명을 들겠다. (<전화벨> 227~229쪽을 보라!)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점이 가장 불편했다. 이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이렇게 아름답게, 똑같은 서정적 톤으로 묘사하는 게 온당한가? 한마디로 신경숙은 '천사'의 눈으로만 현실을 본다. 그러니 그가 그리는 네 명의 주인공들의 삶과 고통, 방황 속으로 작가의 시선이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표피만을 그린다. 그러니 작중 화자는 다양해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작가의 목소리만을 전한다.
독자들도 쉽게 작품을 읽으면서 실험해볼 수 있다. 작품의 등장인물 이름을 가리고 그가 하는 말이 누가 하는 말인지를 맞혀보시라. 쉽지 않을 것이다. 인물은 각기 달라 보이지만 모두 작가의 '스피커'에 불과하다. 각 등장인물은 그들의 고유한 면모를 지니지 못하고, 작가의 '감상'과 '회고'를 전달하는 매개체에 불과하게 된다. 그 매개체들을 통해 표피적으로 전달되는 고통에 대한 연민, 동정, 눈물의 정서. 그런 감상성이 대중 소설의 미덕이다. 이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된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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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은 작가 후기에서 이렇게 적는다.
"청소년기를 앙드레 지드나 헤세와 함께 통과해온 세대가 있었다면 90년대 이후엔 일본 작가들의 소설이 청년기의 사랑의 열병과 성장통을 대변하는 것을 보며 뭔가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한국어를 쓰는 작가로서 우리말로 씌어진 아름답고 품격 있는 청춘 소설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374쪽)
신경숙 본인이나 베스트셀러가 된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이 작품을 "우리말로 씌어진 아름답고 품격 있는 청춘 소설"이라고 믿는다면 그건 그들의 자유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판단은 제대로 된 "품격 있는 청춘 소설"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의 아름다움은 미려한 문체로만 얻어지는 게 아니다. 고통을 그릴 때는 거기에 걸 맞는 끔찍할 정도로 냉정하고 냉철한 문체를, 아름다운 대상을 그릴 때는 거기에 걸 맞는 고양된 문체를 적절하게 선별하여 부릴 줄 아는 작가가 좋은 작가이다. 그렇게 내용과 형식은 분리될 수 없다. 아무 대상에 대해서나 '미문'을 쓰면 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런 점에서 신경숙은 아마도 그녀가 자부심을 지니고 있을 그녀의 유려하고 서정적인 문체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그녀는 지금 자기복제의 위험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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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나는 <엄마>와 <전화벨>이 내가 읽기에 훌륭한 소설이 아니라고 말해왔다. 그렇다면 이 작품들은 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가? 혹시 내 읽기와 판단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이 질문의 답을 찾아보려고 몇 편의 관련 평론을 구해 읽었다. 그러나 여전히 궁금증은 해소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 작품들을 다루는 평론들이 1990년대 이후 한국 비평계의 고질병으로 지칭되어온 '주례사 비평'과 '정실 비평'의 좋은 예가 아닐까? 그런 의문이 다시 들었다. 그와 관련된 기억 하나.
<엄마>가 출간되고 나서 베스트셀러가 될 기운이 보이자, 작품 판매를 독려하려는 듯이 이 소설을 낸 출판사에서 내는 계간지에는 이 작품을 한껏 띄워주는 평론이 실렸다. 나는 지금도 묻고 싶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설령 <엄마>가 그 평론의 상찬대로 뛰어난 작품일지라도 그런 식의 자화자찬형 호평은 면구스러운 일이다. 하물며 내가 보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는 작품에 대한 호들갑은 아무리 먹고 사는 게 중요한 자본주의 출판 시장이고 그 출판사에 종속된 비평가라지만 정도를 넘어선 일이다. 내가 읽은 두 편의 평론을 다시 살펴보면서 그런 '정실 비평'의 문제를 가늠해보겠다.
먼저 계간지 <창작과비평>의 편집위원이었던 임규찬이 쓴 <전화벨> 론인 '청춘을 향한 공감과 연민의 인간학'(<창작과비평> 149호(2010년 가을))을 보자. 임규찬은 <전화벨>은 "<엄마를 부탁해>와 함께 작가가 오랫동안 품고 있다가 때가 되어 차례로 탄생시킨 이란성쌍둥이 같았다. 무엇보다 '어머니'와 '청춘'이라는 식상하기 쉬운 소재에 남다른 소설적 육체와 창조적 생기를 불어넣은 것이야말로 신경숙의 능력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지"(449쪽)라고 고평한다.
<엄마>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할 신형철의 글에서 논의하겠다. 내 질문은 이렇다. 과연 <전화벨>이 "'청춘'이라는 식상하기 쉬운 소재에 남다른 소설적 육체와 창조적 생기를 불어넣은" 작품인가?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임규찬은 이야기의 구조와 예의 서정적 문체를 근거로 든다.
"이 책은 확실히 문학적 수완이 돋보이는 신경숙 미학의 한 성채다. 작품의 모든 언어는 그만의 문체로 직조되었고, 이야기는 미학적으로 구조화되었다. 정윤과 명서의 사랑을 축으로 하여 이들에게 가족과 다름없는 친구 단과 미루의 이야기를 끌어안고 있는 단순한 구조지만, 구체적 전개과정은 복잡하다" (450쪽)
핵심은 마지막 문장에 있다. 소설의 전체 구조는 단순하다. 그 단순함은 앞서 내가 지적했듯이, 소설의 구조를 지탱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입체적이지 못하고 작가의 '감상'을 전달하는 도구에 머문다는 데 있다. 그런데 임규찬은 이들이 펼치는 이야기의 "구체적 전개 과정은 복잡하다"고 토를 단다. 묻는다. 무엇이 복잡한가?
내가 보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과 같은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던 내가 보기에는 진부하고 상투적이다. 임규찬도 이 소설이 소설의 문법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그의 지적대로 이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이다.
"대개의 소설이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어떤 하모니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데 비해, 신경숙은 확실히 공감과 연민의 인간학으로 하나의 멜로디를 지향하고 있음이 이 작품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452쪽)
임규찬은 이런 지적을 칭찬으로 하고 있지만 앞서 지적했듯이 이런 지적은 비판으로 읽혀야 한다. <전화벨>은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어떤 하모니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작가가 전달하려는 "공감과 연민의 인간학으로 하나의 멜로디를 지향하고 있"다. 이 소설이 에세이에 가까운 이유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소설로서 실패했다. 그런데 임규찬은 오히려 그런 실패를 성공의 이유로 든다. 이해하기 힘들다. 임규찬의 결론이다.
"어쨌든 낯익은 청춘 소설을 거부하며 이렇게 대중적인, 어떤 의미에서 통속적이기조차 한 요소에 품격을 부여해, 적극적으로 우리말의 무늬를 새기고자 하는 교양 소설의 면모에서, 그리고 그의 연이은 문학적 성취를 생각하면 바야흐로 신경숙의 진경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453쪽)
나는 임규찬이 안목이 있는 비평가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글을 읽으면서 실망했다. 정말 임규찬이 이렇게 생각하고 썼다면 그의 비평가적 안목이 의심스럽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쓴 것이라면 비평가적 정직성이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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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지음, 창비 펴냄). ⓒ창비
두 번째 평론으로 신형철이 쓴 '누구도 너무 많이 애도할 수 없다 : 신경숙의 소설과 애도의 윤리학'(<문학동네> 64호(2010년 가을))을 살펴보자. 미리 말해두자. 나는 신형철 평론을 즐겨 읽는 애독자이다. 나는 그의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문학동네 펴냄)를 근년에 읽은 가장 인상적인 문학 평론집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작품의 결을 세심하게 살피고, 독자와 대화를 나눌 줄 아는 글을 쓰는 좋은 비평가이다.
그런 기대를 안고 신형철이 쓴 신경숙 론을 읽었다. 그런데 그가 쓴 신경숙 론은 실망스러웠다. 먼저 <엄마>에 대한 그의 분석을 보자. 신형철은 <엄마>를 비판하는 비평들을 언급하면서 "이들 비판적인 논평들은 이 소설이 모성을 신비화하면서 모성으로부터 위안을 얻으려는 퇴행성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고 비판한다. 이런 비평들은 "교과서적이어서 따분한 논법"(86쪽)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신형철은 예의 "무수한 대중들의 소박한 항변"(86쪽)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도 잘 알겠지만, 대중들의 소박한 항변이 엄격한 분석과 판단을 해야 하는 비평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는 걸 영화 <디 워>를 둘러싼 논쟁은 잘 보여준 바 있다.
그렇다면 신형철은 왜 <엄마>를 높이 평가하는 걸까? 신형철의 독서 실감은 이렇다. "한국 특유의 가부장제 가족 구조가 근대화, 산업화 과정과 만나면서 어머니라는 존재의 고유한 내면성을 말소해온 맥락과 그 결과를 냉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게 독서의 실감이다"(87쪽). 그런가? 이런 정도의 답변은 한국 문학의 어머니상을 재해석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에서 이미 제기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어머니들'도 그들만의 내밀한 삶이 있었다는 것. 그들도 남편이나 자식들과 같은 욕망을 지닌 인간이었다는 것. 이 작품이 이것과 다른 어떤 새로운 모성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가? 이 질문의 답을 신형철은 이렇게 비껴 제시한다.
"어머니의 실종 앞에서 (가족들이 드러내는-인용자) 이 사소한 기억들은 거대한 죄의식으로 되돌아온다. 바로 여기가 핵심이다. 만약 이 소설을 읽고 모성에 대한 향수에 젖거나 모종의 위안을 얻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은 거의 불가사의한 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먼저 압도적인 죄의식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87쪽)
내가 보기에 신형철이 내세우는 "무수한 대중들의 소박한 항변"은 바로 이 모성과 관련된다. 신형철은 애써 부인하려 들지만 대중은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소박한, 그러나 이제는 사라져가는 모성에 대한 향수가 있기에 역으로 "죄의식"을 느끼는 거다. 신형철이 자주 기대는 정신분석학을 빌려서 말하자. 향수와 죄의식은 손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이 점이 <엄마>와 영화 <워낭소리>가 대중에게 호소력을 지녔던 이유이다. 그러나 되풀이 말하자면 <엄마>는 모성에 대한 어떤 새로운 인식도 독자나 관객에게 주지 않는다.
여기서 상세하게 논의할 수는 없지만, 굳이 비교하면 봉준호의 영화 <마더>가 좀 더 충격적인 모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많은 평자들이 <엄마>에서 재현된 모성성이 '퇴행적'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 있다. <전화벨>을 신형철은 '애도'의 시각에서 읽는다. 그답게 날카로운 분석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이 작품이 지닌 '회고'의 의미를 '애도'와 깊이 연결하지 않는다. 신형철은 애도의 (불)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예로 <전화벨>을 읽는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의 '애도'는 실패했다고 본다. 애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과거로의 퇴행, 과거의 신비화가 일어난다. 애도를 해야 하는 이유는 죽은 이들은 그들의 세계로, 산 사람은 삶의 세계로 각자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도 행위의 목적은 언제나 살아야 하는 사람을 위하는 것이다. 고통스러워도 현재의 삶을 살아남은 사람은 계속 살아야 한다. 과거를 회고하는 '후일담 문학'의 문제도 여기 있다. 회고되는 과거가 문제가 아니라 회고하는 현재가 문제이다. 현재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과거가 신비화될 때 애도는 실패한다. 과거를 '과거'로 떠나보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현재의 삶도 제대로 살지 못하게 된다. 많은 후일담 문학이 비판받는 이유이다.
<전화벨>도 예외는 아니다. 작품을 "애도의 서사"로 규정한 신형철도 이 점을 의식한다. 신형철의 지적대로 이 작품은 "애도의 서사"에 머물고, "애도의 윤리학"(95면)에 이르지 못한다. 굳이 지나간 1980년대의 "청춘"을 회고하는 작업이 지금, 이곳의 작가나 독자들에게 갖는 의미를 작품은 깊이 반추하지 못한다. 신형철도 그 점을 비판한다.
"두 가지 정도의 질문을 더 질기게 물어야만 애도의 서사가 애도의 윤리학에 도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첫째, 애도 작업은 주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둘째, 그 주체를 위해 공동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전화벨>은 뭔가를 더 물어야 하는 그 순간 멈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96쪽)
날카로운 분석이다. 그런데 신형철은 더 "질기게" 묻지 않고 중단한다. 아쉽다. 그러나 이미 신형철은 그가 쓴 김훈 론에서 이 두 가지 질문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인간적인 것의 한 가운데에는 지극히 비인간적인 어떤 것이 있다. 그것과 고통스럽게 대면하지 않는 모든 윤리학은 허위다, 라는 것이 정신분석학적 윤리의 공리다. 이런 논점들은 김훈의 반인간주의도 얼마간 공유하는 것들이다. 그는 '한국 문학의 거의 대부분은 인간에 대한 연민의 바탕 위에서 놓여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연민의 문학을 거절하는 까닭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을 명철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아름다운 통념들을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인간을 믿지 않고 연민하지 않을 때 역설적이게도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가능해진다, 라고 그는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반인간주의는 역설적인 인간주의가 된다." (신형철,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 <몰락의 에티카>, 52쪽)
"자기변명을 늘어놓지 않는 것이야말로 유물론에 대한 유일한 정의"라는 알튀세르의 언명을 인용하며, 신형철은 이것이 "김훈의 유물론"(60면)라고 요약한다. 나도 공감한다. 그는 김훈 소설의 핵심을 잘 포착하고 있다.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신경숙 소설은 얼마나 "반인간주의"에 가까운가? 신경숙 소설은 김훈이 비판하는 "연민의 바탕 위에서 놓여진" 소설의 좋은 예가 아닌가? 신경숙 소설은 "인간에 대한 아름다운 통념들을 과감히 포기"하기는커녕 그에 공모하고 있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신경숙 소설은 "인간적인 것의 한 가운데에는 지극히 비인간적인 어떤 것이 있다. 그것과 고통스럽게 대면하지 않는 모든 윤리학은 허위다, 라는 것이 정신분석학적 윤리의 공리"라는 것에 둔감하며, 그래서 "유물론"적 글쓰기에 매우 미달하는 작품이 아닌가? 그런데도 어떻게 <엄마>와<전화벨>이 좋은 소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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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이 있는 비평가라고 항상 공감할 만한 글을 쓸 수는 없다. 그리고 임규찬이나 신형철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독할 대목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읽기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나는 이런 의문을 품게 된다. 내가 신뢰할 만한 비평가라고 여겨온 이들조차 납득할 만한 글을 못 쓰는 이유가 혹시 작품외적인 데 있는 것은 아닐까?
임규찬이 편집위원을 지냈던 출판사에서 베스트셀러 <엄마>를 냈고, 역시 신형철이 편집위원으로 일하는 출판사에서 후속 베스트셀러 <전화벨>을 냈다는 사실은 그들의 납득할 수 없는 신경숙 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까? 나는 여기서 '비평의 위기'를 느낀다. 한국 문학 비평에서 제대로 된 비판, 혹은 예리한 독설이 사라진 지 오래라는 말을 나도 종종 들었지만, 이번에 신경숙 소설을 나 나름대로 읽고 관련 비평을 읽으면서 그 점을 실감한다.
많은 비평가들이 '공감의 비평'을 말한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작가 로런스(D. H. Lawrence)의 충고. "비평은 흠잡기가 아니다. 균형 잡힌 의견이다." 로런스의 말은 이렇게도 읽어야 한다. "비평은 주례사가 아니다. 균형 잡힌 의견이다." 균형 잡힌 의견을 개진하려면 아무 작품에나 공감을 표명해서는 안 된다. 공감할 수 없는 태작에 대해서는 내장을 후벼 파는 독설도 때로는 필요하다.
내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독일과 미국의 비평가인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와 미치코 가쿠타니는 공감과 독설 사이의 균형이 무엇인지를 그들의 날카로운 분석과 판단으로 잘 보여준다. 말이 좋아 '공감의 비평'이지 실상은 '정실 비평' 혹은 '주례사 비평'이 계속 생산된다면 앞으로 한국 문학 비평은 '위기'를 넘어서 예고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독자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비평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아무 작품이나 무조건 좋다고 하는 비평을 어떻게 믿어야 하나? 차라리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털어놓는 일반 독자들의 인터넷 독서 후기가 더 신뢰할 법하다. 이 눈치 저 눈치봐가면서 쓰는 비평은 이미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망각한 것이다.
되풀이 말하지만 비평(criticism)은 곧 비판(critique)이다. 공감과 비판 사이의 균형을 잃은 비평은 쓸 이유도, 읽을 이유도 없다. 이쯤 되면 이제 한국 문학 비평계에서도 알맹이 없는 고담준론이 아니라 자신의 감식력을 걸고, 툭 까놓고 작품에 대한 평가의 별표 매기기부터 해야 되는 게 아닌지. 그 정도의 서비스는 독자들에게 해줘야 최소한 비평의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허튼소리 그만두고 이런 기본적인 서비스부터 비평가들은 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묻는다. 우리시대의 비평가들, 당신들은 누구인가? 세간에 떠도는 말대로 출판 자본에 종속되어 수준도 안 되는 작품을 예쁘게 포장해주는 '문학 코디네이터'인가? 아니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비평가인가? 신경숙 소설을 읽으면서 뜬금없이 드는, 한 까칠한 독자의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