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fore sunrise │ troi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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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TV 채널을 이리 저리 돌리다가 Before sunrise라는 영화를 만났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꽤나 익숙한 영화였다. 바로 전 남자친구가 꼭 같이 보자고 늘 이야기했던 영화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귀기 시작했던 시점에 영화관에서는 한창 Before midnight이 상영 중이었다. 그는 그 영화를 참 보고 싶어했지만 Before sunrise와 Before sunset을 보고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며 나중에 그 세 영화를 꼭 같이 보자고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영화의 분위기가 나도 참 마음에 들어서 여유가 생기면 꼭 같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 . 어떤 영화일까, 궁금한 마음이 들어 이제 시작한 지 십오 분쯤 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여배우와 익숙한 에단 호크. 어떤 다리 위에서 두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막 비엔나에 내렸는데 뭐 재미있는 일 없느냐며, 묻고 있었다. 줄거리는 대충 들었기에 아, 이제 막 같이 기차에서 내렸구나, 하는 짐작을 했다. 그 둘은 이곳 저곳을 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둘이 특별한 걸 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저 아주 일상적인 것들을 했지만 그 일상적인 것들을 함께 하며 나누는 대화들이 참 재미있었다. 사실 대화 자체도 아주 일상적인 대화이지만 처음으로 만나 서로가 가진 생각들에 대해 가감없이 털어놓는 그런 자연스러움과 뭔가가 통한다는 느낌이 꽤나 간지러웠던 것 같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볼수록 전 남자친구가 나에게 가졌던 환상,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나와의 관계에서 가졌던 환상이랄까. 전 남자친구와 나와의 관계도 어쩌면 약간의 환상이 가미된 관계였다.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서로 만남을 갖게 되었고, 만나면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내 일과가 끝난 밤 시간에 두 시간, 세 시간 쯤 벤치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온갖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들. 웬만해서는 잘 털어놓지 않는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그런 로맨틱한 관계에 대한 환상이 있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 영화를 아주 좋아했고 아무리 보아도 영화 속 주인공들이 만나는 방식이 나와 그가 만나던 방식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가 나와 했던 것들 중 아주 좋아했던 것들이 몇몇 보였다.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 . 뭐, 무리한 생각일 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느낌일 뿐. 이 영화를 보면서 아직도 그 사람을 생각하는 나는 어쩔 수 없이, 쓸데없이 감성적인 아이인듯. 얼마 전 들어가본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의 엄마의 페이스북. (이런 식의 연결이 가끔은 소름끼칠 때도 있다.) 나와 한창 만나던 때에 전 여자친구, 전 여자친구의 엄마와 여동생, 그리고 나의 남자친구가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았을 때 느꼈던 '싸가지 없는 새끼' 라는 욕은 어디로 가고 무언가 가련한 느낌이 남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엄마와 자랐다는. 엄마는 따뜻함이 없었어서 가정의 따뜻함이 참 그립다는, 그 말들을 떠올리며 전 여자친구의 가족들이 주는 따뜻함을 쉽게 떨치지 못하는 걸까, 그렇다면 참 가련하다, 는 생각을 해본다. 누구보다도 강하고 누구보다도 더 현명한 척 했던, 그래서 참 커보였던 그가 내 무릎으로 기대어 쓰러지는 순간이었다. . . 영화는 그저 그랬다. 딱히 화면이 좋지도 않았고 하도 많이 들어서인지 구성도 뻔했다. 여배우는 참 예뻤고 에단 호크는 내 취향이 아니고 중간 중간에 나오는 감성적인 포인트들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시를 지어주고 돈을 받는 거지라든지 점을 봐주는 노파라든지 공짜 와인을 받는다든지, 좀 낡은 낭만코드랄까. . . 인상깊었던 점은 이 낭만을 받아들이는 여자와 남자의 차이였다. 점을 봐주는 노파를 만났을 때 여자는 참 멋진 일이라고 감탄했지만 남자는 원래 점쟁이들은 다 좋은 말만 한다고 이야기했다. 시를 지어주는 거지를 만났을 때 여자는 참 멋진 시라고 감탄했지만 남자는 원래 지어놓았던 시일 거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남자가 했던 종류의 말들은 늘 나를 상처입히는 말들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생각할 수가 있지?' 라고. 뭐,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생각의 차이일 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고 저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거라고. 그리고 남자들은 종종 저렇게 받아들이기도 한다고. 아니, 종종보다는 조금 더 많을 수도 있고. 아무튼 굳이 내가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 그리고 굳이 Before sunset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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