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이틀째 │ troi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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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부터 일을 하기 시작했다. 상담 선생님이 소개해주신 NGO인데, 아주아주 만족스럽다. 내가 평소에 일하고 싶어하던 성(性)과 관련된 곳인데다 근무 일정도 주3일로 내 기존 일정과 맞출 수가 있다. 하루 8시간에 시급은 약 8000원. 그냥 일을 시켜줘도 감지덕지할 판에, 이런 조건으로 일을 할 수 있다니. 기존에 하던 아르바이트와는 차원이 다르다. 일단 첫 째, 그 곳에서 나는 '고용된 사람'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람'이다. 흔히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주지받는다. 해야 할 일은 매장마다 다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매장마다 비슷하다. 핸드폰 보고 딴 짓 하지 않는다, 장시간 쉬지 않는다, 앉지 않는다, 재료를 먹지 않는다, 친구들이 와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등등. 즉, 수익에 해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성격 좋은 고용주가 있는 곳에 가도 이러한 원칙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저런 것들을 일 하면서 마음껏 하는 게 맞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차피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저런 것들은 하지 않게 되기 마련인데, 괜히 하지 말라고 하면 기분이 더 나빠지는 그런 원리인 것이다. 내가 마치 돈 버는 부속품이 된 것 같아서. 나보다는 돈이 더 중요한 것 같아서. 사실 사장에게는 그렇기야 하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곳에서 '선생님'으로 불린다. 사실 나보다 기본 스무살 씩은 많은 분들인데, 내가 어려도 너무 어린데, 습관의 연장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래도 나는 선생님으로 불리고 내 자리도, 내 컴퓨터도 있다. 퇴근 시간이 되면 아무의 눈치 볼 것도 없이 내 할 일 끝났으면 그냥 가면 된다. 내가 일 하는 걸 보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도 없다. 밥을 먹다가도 손님이 오면 뛰쳐나가야 하는 것도 아니다. 점심 시간엔 걸려오는 전화도 받지 않는다. 사장들 눈치 보느라 밥을 빨리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나는 하루 종일 나로 있을 수 있다. 고객 앞에서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고,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 일 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할 수 있다. 이런 자리를 찾고 찾고 찾고 찾고 또 찾고 찾았는데, 드디어 찾게 되었다. 감격이다, 감격. 물론 가끔 아찔할 때가 있긴 하다. 예를 들어, 사무실에는 여러 가지 자료가 있는데 그 중에는 가해자 치료 프로그램에 대한 자료가 있다. 그 내용을 보다보면 나도 모르게 내 경험이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겪은 일에 대해서, 더 넓은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 확실히 이 곳은 새 세상이었다. 하루에도 몇 통의 성폭력 상담 전화가 걸려온다. 나 혼자, 내 경험만을 생각하며 살았을 땐, 내 경험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전혀, 지금도 도처에서 수많은 성폭력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일어나는 성폭력의 수만큼 성폭력을 예방하거나 피해자에게 도움을 주거나 가해자를 치료하기 위한 다양하고 수많은 노력들이 존재한다. 나를 그렇게 넓은 맥락 속에 놓고 이해하니, 점점 사고가 트이는 느낌이 든다. 사실 아직 이 느낌을 어떻게 말로 정리해야 될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 . 물론 아직까지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해방이 되었다면 이 곳에서 일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 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란, 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망이나 좌절이 아니다. '수긍'이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설혹 기억 상실증에 걸린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은 내 안에 남아 있다. 나에게 남은 것은 그 모든 것들과 어떻게 사이 좋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들과 친해지는 시기다. 친구를 사귈 때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누군가와 친해지는 데에는 시간에 따라 여러 단계가 있다. 그리고 대개 처음에는,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 시기를 거친다. 서로의 장점은 물론이고 단점까지 겪으면서, 싸우고 화해하고 울고 다시 싸우고 붙으면서 다져지는 그런 시기. 그런 시기가 한바탕 지나가고 나면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아니 말을 하지 않아도 이해를 할 수 있는 그런 단계가 오는 것이다. 지금은 '이해하는' 시기다. 나는 지금까지는 이 아이와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내가 이 아이에게 가혹하게 굴었다. 인정해주지 않았고, 보살펴주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친해지고 싶다. 설령 이 아이와 친해지느라고 다른 아이들과 조금 못 놀게 되더라도, 어쩔 수가 없다. 나한테는 다른 그 누구보다도 소중하고 중요한 친구이니까. . . 이제 더 이상 '나에게 그런 일이 왜 일어났을까' 라는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답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답이 뻔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의 딸로 태어났고, 나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런 일을 겪었다. 아버지가 나를 성폭행했기에 나는 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한 것이다.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고, 팔자가 기구한 것도 아니다. 그냥, 그냥인 거다. 이유는 없다. 엄마에 대한 미움도 거둬들이기로 했다. 우리 엄마는 왜 나를 구해주지 않았을까, 무책임하다, 엄마도 아니다, 나쁘다, 등등. 엄마는 나를 지켜줬어야 한다, 는 전제 아래 끊임없이 반복되는 원망의 굴레. 나조차도 어떻게 할 수가 없던 그 상황들에 나는 누구에게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엄마는 나와 별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대단한 존재도 아니었고, 강하지도 못했다. 그저 나와 같이 약했을 뿐이다. 나는 약했지만, 약한 게 죄는 아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내 잘못인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그랬을 뿐이다. 엄마 역시 마찬가지다. 엄마는 약했고, 나를 지켜주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엄마의 잘못인 것은 아니다. 내가 엄마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상, 나는 나 자신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랬니, 왜 나를 구해주지 못했니, 왜 아버지를 이겨주지 못했니, 엄마를 향한 나의 원망은 속도를 붙여 고스란히 나에게로 꽂히기 때문이다. 약했던 엄마에 대한 원망, 약했던 자신에 대한 분노, 어째서 더 강하지 못했는가, 이게 과연 엄마에 대한 원망일까, 나에 대한 원망일까. 이제 그만 약한 존재에 대한 원망에서 벗어나고 싶다. 약한 것은 죄가 아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야기시키는 능동적인 원인도 아니다. 충분조건도 아니고. 약하면 성폭행 당한다, 라는 명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나는 약해서 당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무력했던 나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내가 했던 노력들을 봐주자. 엄마가 했던 노력들을 봐주자. 내가 나한테 한 잘못들, 엄마가 나한테 한 잘못들, 피해의 상황에서 발버둥쳤던 산소 없는 어항 속의 금붕어들. 왜 도망가지 못했니 - 왜 나를 도망치게 해주지 못했니 왜 저항하지 못했니 - 왜 나 대신 저항해주지 않았니 왜 엄마에게 말 하지 않았니 - 왜 나에게 물어보지 않았니 왜 아버지에게 화 내지 못했니 - 왜 아버지를 이겨주지 못 했니 견고한 고리를 이루고 있는 이상 풀리지 않는다. 끊어버리자, 저 고리를. 도망 가지 못했던 것, 저항하지 못했던 것, 말하지 못했던 것, 화를 내지 못했던 것, 잘못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되어버렸을 뿐이다. 나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지금은 안 그럴 것 같은데 그 때는 왜 그랬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시각으로 그 때를 비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7살 때 쌀 20kg을 왜 못 들었니? 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지금이야 몸집이 커졌으니 쌀 20kg쯤은 거뜬하지만 그 때는 들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나는 이해하지 않고 지금의 기준에서 당시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 때 당시에 나는 도망갈 수 없었던 것이다. 쌀 20kg을 들 힘이 없는 7살 아이처럼, 나는 도망갈 힘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도망갈 수 있겠지만, 그 때는 도망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차이를 이해해야만 한다. 나의 행동을, 그 때의 나의 입장이 되어 이해해주어야 한다. 지금의 내 입장에서만 판단해서는 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돌아가서, 이해하자. 그 때의 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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