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에 대한 긴 보고서 │ 20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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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통화한 사람이 내게 어떤 문제가 있으면 나도 좀 툴툴거려 보라고 했다. 그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내가 아는 나란 사람의 삶에 대한 표상은 스스로 느끼기에 무거워서 무거우니까 회피하고 받아들고 따라가고 혼자 놀면 되는 줄 알았다. 다들 가슴에 담고 있는 이야기 하나쯤 있을테고 이야기가 실제 상황으로 나타나 날 좀 괴롭히거나 힘들 때 너무 속상한데 툴툴거려도 봤지만 내 삶에 내재한 문제라 좀 해결도 안되고 해서 놔뒀다. 5점 척도로 적극해결 4점, 3, 2, 1, 방치 0점으로 본다면 지금은 잘 주면 2점. 최소 1점. 해결은 되지 않아도 방치에 더 가까운 1점은 뭔가 내 할 일에 몰두할 수 있어 편했다. 해결의지를 꺾는 환경무력감보다 힘든 건 없더라 윽.. 그리고 나는 위로가 필요하면 그냥 혼자 놀았다. 컴퓨터로 이것저것 하고 생각도 하고 글도 쓰고. 기쁨이나 슬픔, 환희나 분노와 같은 감정은 사람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건데 분노가 짜증이 되고 이 또한 만성적으로 변해버려 고론 감정. 귀찮아졌다. 장애아동을 보면 때때로 부족하니까 내게 왔거니 화도 사그라지고 그러다 보니 모든 성인사람도 다 부족해보여 그래그래 하고 넘겼다. 그때를 기저로 감정의 귀찮음이 시작되었다. 내가 움직여보고 안되면 남을 동원해보고 그래도 근원적인 문제가 바뀌지 않으니 나란 사람. 포기하게 되더라. 배추세는 단위? 인생은 리얼(real)이다. 답은 없다. 흐림없는 맑은 눈으로 보는 세상은 참 피곤했다. 내 앞길도 정립하지 못하면서 괜히 나만 맑고 순한 척. 살다보면 흙길을 걸을 때도 있고, 보도블럭을 걸을 때도 있고, 좀 많이 걷게 되거나 편히 앉아 갈 수도 있다. 노력해도 안되는 건 있고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살면 되는 이 삶은 언젠가 끝이 올 것이고 일희일비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맘 먹었고 한해한해 목표를 세우고 쫓아 살다보면 시간이 나를 저 쪽으로 데려다준다고 생각했다. 이 쪽 끝에 섰을 때 내가 누구를, 무엇을, 어디를 생각하고 찾을지 궁금했다.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이든, 나로 인해 니가 행복하고 그런 내게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된 것이라 생각했다. 참 재미없는 삶이지 뭐야... 찰리와 초콜렛공장에 나오는 공장주인 이름이...여튼. 요런 증상에 해당되는 정신병리적 명칭이 있을까? 규준에 해당될까? 속상할 때마다 나도 위로받고 싶다고 떠올리곤 했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위로를 받아야할지.. 사회적 관계를 맺은 친구나 동생, 언니와의 소소한 이야기나 만남이 위로가 되어줬는데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 위로받기에는.. 난 자존감이 뭔지 알아버렸다.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게 허물어지는 듯 했다. 극복했다 생각했는데 다시 찾아오니 참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 대해 누가, 얼마만큼 나를 위로해줄거야 위로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아이같았다면 이제 더이상 아이가 아니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며 좀 더 주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세대에 적합한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어린이에게는 칭찬과 꾸지람을, 청춘들에게는 많은 기회와 위로를, 중년에게는 존중과 파이팅을, 노년에게는 존경과 배려를....해주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목소리가 사라진 시대에 모든 세대에게는 위로가 너무너무 필요해보인다. 내 어린 80년대에는 커서 위로받을 필요를 몰랐다. 하지만 21세기 난. 필요하다. 사랑도 필요하고 관심도 필요하고 위로도 필요하다. 그 위로를 받아 감정적으로 적절한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랑해, 힘내, 고마워, 필요해, 재밌어, 행복해, 할 수 있어, 넘어져도 괜찮아, 어떻게 됐니?, 힘드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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