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지들   deux.
  hit : 2808 , 2012-01-30 00:57 (월)

오랜만에 친구들에게 받았던 편지들을 읽어보았습니다.
얼었던 마음이
꽁꽁 닫혀 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위험을 감지한 고슴도치처럼
등가시를 바짝 세우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힘들게 하지 마!
라고 소리 치며
오로지 나 자신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의 행복을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나의 행복이 최우선인 사람은
나 말고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줄 거라고 기대해볼 수 있는 사람들은 부모이지만
나의 부모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의 행복은 내가 지키려 했습니다.
이기적이 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조금 침범하더라도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 선에서
나는 무조건 나부터 행복해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늦은 밤 이불을 깔고 누워
사람들이 나에게 해주는 말들을 들으니
이제는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슬슬 등가시를 내리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안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타인의 감정을 생각해보려는 순간
배가 아려옵니다.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증상.
나는 너무 예민한가 봅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라는 프로그램을 보니
남들보다 예민한 아이가 있다고 하는데
나도 그런가 봅니다.

자극에 민감합니다.
자극으로 인해서 생기는 기분의 미세한 변화에 매우 예민합니다.
그래서 사람 뿐만 아니라
사물도 신경씁니다.
감정을 흐트러뜨리는 것이 싫어질 때면
사람을 잘 만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색깔'을 없애버립니다.
알록달록한 것은 싫습니다.
색깔로 인한 자극조차도 고통스럽습니다.

회색, 검은색, 하얀색이 편합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창밖을 내다볼 때
회색의 건물들이 이어지다가
어쩌다가 보라색 간판이 나오면
눈을 찡그립니다.
보라색이라니.

편지를 읽어보니 
'너는 항상 잘하니까 걱정이 안 든다. 넌 잘 할 거야.'
라는 말이 가장 많았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약한 소리를 안 하려 하기는 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나 자신조차도 내가 힘든 지 안 힘든 지 잘 모릅니다.
그럴 때 좋은 척도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주변을 자꾸만 무채색으로 만들려 할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입고 다닐 때.
온갖 프로필 사진을 검은색으로 채워넣을 때,
색깔이 거슬릴 ‹š
이 땐 예민하고 우울하고 힘든 겁니다.

초콜릿을 먹을 때.

자꾸만 물렁물렁한 것, 바삭한 것을 씹으려고 할 때.

주변 사람들이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

이 때 스트레스를 받는 겁니다.


-

그리고 나는 항상 갈망합니다.
누가 이런 것들을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나는 항상 잘 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는 법을 모르고
응석 부리는 법을 모르는 거라고.
그래서 언제나 혼자 처리하는 것 뿐이라고.

내가 반복적이고 강박적으로 하는 망상 중의 하나는
바로 타인이 나의 슬픔과 고통을 알아주고 위로해주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을 가정하든,
'너는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니.'
같은 위로와 경탄의 말을 듣는 상황들을 반복적으로 상상하면서
묘한 쾌감을 얻습니다.

또 다른 망상은 힘들다고 토로하는 망상입니다.
울면서, 하고 싶은 말 펑펑 하면서 응석 부리는 망상.

-

뭐,
그래도 편지를 읽고 나니
힘도 나고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요즘은 내게 주어진 시간으로 인해 불안했던 마음도
조금은 진정되었고,
약간은 여유롭게 시간을 어떻게 보낼 지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편지들을 읽고 나니 좋은 점은
다시 한 번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이지요.
타인으로 인해 다시 한 번 자존감을 얻습니다.
역시 세상은 혼자 살 수는 없는가 봅니다.

-

나는 좀 괜찮은 애인 것 같습니다.
생각이 곧고 깊습니다.
비틀거리다가도 언제나 제 길을 찾아갑니다.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과
나의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닌 것은 아닌 것-
학벌에 반대하면서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갈 수는 없다며 
세간의 기준에서는 낮게 평가 되고 있지만 
나에게는 그 어떤 대학보다도 대학다운 대학에 입학했고,
젊음을 스펙에게 빼앗길 수 없다며
그 어떤 스펙쌓기 작업도 하지 않고 있으며
오로지 내가 원하는 것,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본의 노예가 되기는 싫다며
오로지 돈을 위해,
돈을 시간과 맞바꾸는 아르바이트는 지양하고 있으며,
언어 공부는 오로지 번역서가 아닌 원서를 읽고 싶다는 바람에서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이 나를 속박하게 두지 않고
언제나 그 올가미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하나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

이렇게 열심히 장점을 설교하는 걸 보면
또 약간은 불안해진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언제나 다시 오뚝이처럼 제자리로 돌아오니
괜찮습니다.

-

울다 여러분
굿밤♡
티아레  12.01.30 이글의 답글달기

메인그림 참 예뻐요. 하나양처럼.

마음이 너무 아프고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하나양의 가족들에게 화가났구요.
지난번 댓글에 내 표현이 좀 거칠었지요.
미안해요.

李하나  12.01.30 이글의 답글달기

아니에요. 티아레님의 댓글을 읽고 느낀 것이 많았어요. 결국은 시골에 내려갔지만, 가서 소심하게나마 내가 지금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안 좋다는 것을 표현해봤어요. 예전 같았으면 뭔지 모를 죄책감에 무조건 아빠에게 잘 대해줬을텐데, 이번에는 잘 해주지 않았어요. 말도 별로 안 하고. 아빠도 내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더군요. 더 이상의 대화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싫은 감정을 표현한 것만으로도 좋았답니다. 언제나 도움이 되는 댓글 감사해요:-)

억지웃음  12.01.30 이글의 답글달기


글을 보면 하나님은 작고 여리지만 단단한 보석같은 맘을 지니신 분 같아요~
그리고 당차고 명확한 주관을 가지셨다는 부분이 참 부러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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