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말리온 │ deux.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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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신화에 피그말리온이라는 남자가 나온다. 자기가 조각한 조각상을 사랑하게 된 남자. 초등학생 때인가 중학생 때인가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책이 있었는데 거기서 처음 그 남자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 때는 '미친' 이라며 비웃었다. 좋아할 게 없어서 조각상을 좋아하냐, 라며 그 어린 마음에도 웃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피그말리온을 이해할 것도 같다. - 그저께, DP되어 있던 옷이 팔려서 남자 마네킹에 새로 잠바를 입혔다. 팔 한쪽을 끼고 다른 한쪽도 마저 끼기 위해 남자 마네킹의 목을 이렇게 끌어 안았다. 기분이 묘했다. 마네킹이란 물건 자체가 가장 이상적인 체형으로 만들어져서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목을 끌어 안는데, 아, 남자에게 안기는 것은 이런 기분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기분 좋은 느낌. . . 살면서 나를 안은 남자는 아버지뿐. 그러나 나는 그것이 지독하게도 싫었다. 그 냄새도 그 턱수염의 느낌도 그 불룩 튀어나온 배와 그 아랫부분도, 그 목소리도 그 충혈되고 누렇게 뜬 눈동자도 그 입냄새도 그 머리카락도 그 혓바닥도 그 마디굵고 뻣뻣한 손가락도 그 털 많은 다리도 전부 다 소름끼치게 징그럽고 더러웠다. . . 태어나 처음 경험한 남자에 대한 긍정적인 경험. 어쩌면 남자 마네킹은 남자처럼 생겼을 뿐 남자 냄새도 나지 않고 남자 느낌도 나지 않고 머리카락도 없고 말도 하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신경과 근육도 없고 무엇보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없으니 그런 느낌이 들었나보다. 아무튼 '안기고 싶다.' 라든지 '사귀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든 것은 정말로 처음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동안 연애를 하지 못했던 이유를 알았다. 나는 남자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싫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쯤인가, 고백을 받았다. 아버지에게. 나를 좋아한다고.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런 내리 사랑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한다며 나에게 관계를 요구했다. 충격적인 밤이었다. 나는 울었고 아버지도 울었다. 같이 울었다는 것조차 더럽게 추억되는 밤. . . 꼬꼬마 초등학생 때는 사귀었던 남자친구 두 명 모두, 내가 고백한 상대였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어 처음 고백받은 상대가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는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욕망을 강요했고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힘으로 응징했다. 내가 울면서 이야기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다 너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나는 울면서 이야기했다. '사랑한다면서 왜 때려. 사랑한다면서 왜 울게 해!' 소용 없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잔인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사랑이라는 것이 싫었다. 얼마든지 달콤할 수 있지만 또 그만큼 잔혹할 수도 있는 사랑이라는 것이 싫었다. 그걸 깨달은 건 아마 조금 더 어렸을 때였던 것 같다. . .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내 마음을 숨기려 하는 것, 나는 그저 내가 부끄럼이 많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뿐만은 아닌 것 같다. 좋아할 줄은 알게 되었지만 남자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여전히 싫어했기 문에 그렇게 무던히도 상대를 밀어냈던 것이다. . . 그래서 생각했다. 아무리 아버지라는 한 사람 때문에 모든 남자를 원망하지 말자고 마음 먹어도 몸의 기억은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남자의 냄새 남자의 호르몬, 등등 남자로 느껴질만한 것들과의 접촉에 내 몸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오랫동안 쌓여온 생존방식인 것 같다. . . 그리고 어떻게 하면 연애를 할 수 있을 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남자와의 긍정적 경험, 좋은 느낌 쌓기' 그동안 나에게 남자는 징그럽고 껄끄러운 존재일 뿐이었다. 닿는 것도, 그 쪽이 나를 좋아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이제 이런 나쁜 기억들을 좋은 기억들로 대체해 나가고 싶다. .- 일단 냄새에 익숙해져야 해. 난 후각에 민감하니까. 그 다음이 촉각이고. 그 다음이 청각이고. 시각은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뭐 주변에 이미 남자들은 많으니 천천히 실습을 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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