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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일기 한줄일기 내일기장
李하나
 진짜 신기하다.   trois.
조회: 2267 , 2013-02-16 23:54


지난 일기를 읽어보면
나는 오빠와 사귄 지 일주일이 된 그 시점부터
이미 지쳐가고 있었고
헤어짐을 생각하고 있었다.

11일째,
오빠와 처음으로 섹스를 하던 그 날,
나는 혼란스러웠고
오빠를 원망했으며
역시 강하게 헤어짐을 고민했다.

'오빠 때문에'



.
.

그런데 중간에 길을 잃어버렸다.
자꾸만 내 탓을 했다.
내가 성폭행을 당해서 이 모양이야
내가 가정 환경이 불우해서 이 모양 이 꼴로 
연애를 하고 있는 거야
오빠가 너무 불쌍해


이러면서.


그래서 돌고 돌아 결국 헤어지게 됐는데도
지금까지도 나는 
나 때문에 
내가 힘든 시기여서
오빠가 버티지 못하고 떠났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

그런데 
지난 일기들을 쭉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내가 힘들어진 시점은 8월 이후, 
그러니까 거의 공황상태가 온 게 그 때쯤.
그래서 나는 내가 공황 상태가 와서
오빠랑 제대로 연애를 못 했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전혀 공황상태가 아니던
완전 연애 초기에도
나는 오빠와의 만남을 힘들어하고 있었다.



읽는 순간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처음부터 이랬네? 



.
.




나는 순전히
오빠에게 상처받고 서운해서 헤어진 거지
인생이 이 모양이어서 헤어진 것이 아니었다.
내가 힘들어서 오빠한테 잘 해줄 수 없었던 게 아니라
그 전부터 이미 나는 오빠에 대한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좋아하는 지 확신이 잘 서지 않고
연락이 오는 게 자꾸만 귀찮고
그다지 좋지 않고.

그런데 사귀면서
점점 나 자신을 잃어갔던 것 같다.
주변에 사람도 없고
점점 오빠에게 의존하게 되면서부터.



.
.



그런데 무서운 건 
그 길 안에 있을 때는
도저히 이게 안 보인다는 거다.
그래서 다음에도 또 이러면 어떡하나
걱정이 많이 된다.

그것 때문에 자꾸 
오빠와의 연애를 붙잡고 있는 것 같다.

자꾸만 
문제를 파헤치려고 한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이렇게 하면 달랐을까,


이런 분석들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
.




답은 나와 있었다.
한국에 돌아왔던 그 시점부터.
나는 내 직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그렇게 먼 길을 돌아 
결국에는 갈 길을 갔을 뿐이다.

오빠가 헤어짐을 결심한 건 
아마 크리스마스 전 후.
그 때부터 확연히 태도가 바뀐 것을 느꼈다.

만나서도 일찍 집에 들여보내고
스킨쉽도 줄어들고.
나 또한 그랬고.

그래서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그럴 것 없다.
너는 한 달 동안 이별을 생각했지만
나는 너와 만나는 내내 이별을 생각했어.

하지만 노력한 거야.
내 선택에 책임을 지기 위해.
내 감정에 충실하기 위해.
관계를 통해 성장하기 위해.

나는 우리가 좀 더 나아지기를 간절히 바랐어.
그래서 최선을 다했던 거야.

나는 너무너무 불편했어.
네가 또 다시 질내사정을 할까봐 조마조마했지.
왜 콘돔을 쓰지 않는지
정말 모르겠는데
이 주에 한 번 만나는 너한테는
그런 걸 물어볼 수가 없었어.
나란 여자가
원래 자주 얼굴을 맞대고 신뢰를 쌓지 않으면
마음이 쉽게 열리지 않는 여자거든.

넌 나를 잘 몰랐던 거야.
나 조차도 나를 몰랐기에 너에게 나를 알려줄 수 없었고.

왜 나는 네가 나를 보러오지 않는 지 이해할 수 없었어.
네 모든 행동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
그렇다고 그걸 너한테 일일이 얘기할 만큼
내가 자존감이 높진 않았어.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넌 좀 평균 이하였던 것 같아.

그런 모든 것들을 내가 일일이
너에게 말해주기에는 힘들었어.
나의 첫상대로 너는 좀 까다로운 상대였달까.

나랑은 잘 안 맞았으니까.



.
.


대화도 안 통하고.
사실 너를 짝사랑하는 그 삼 개월 동안 
우리는 참 무수히도 카톡을 하고
장난을 쳤지만
'대화'를 한 적은 없었어.

공통의 주제가 없었거든.
나는 주로 듣는 편.
너도 그리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

그러니 서로 대화를 하면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기 일쑤였지.
뭐, 어쩔 수 없지만.




.
.

대화를 통해 풀 수 없으니
쌓여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
매일 얼굴이라도 보면
어떻게 풀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매일은 커녕
이 주에 한 번 꼴로 만나는 너에게
나는 가면밖에 보여줄 수 있는 게 없었어.

차라리 그냥 
처음에 헤어지자고 할 걸.
그 때 헤어졌으면 
그렇게 공황상태로 힘들지 않아도 됐을 지 모르는데.



.
.


아무튼
이런 저런 이유로
너와 나는 인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