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새벽 3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왔다. 동네 사람들과 이태원에 가서 거나하게 술잔을 기울였던 것이다. 술을 즐기지만 과음을 하지 않는 성격상 세시 넘어서까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한편으로는 심오하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술보다도 술마시는 분위기를
외로울 때는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를 더 좋아했다는 것을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인가
90년대 커다란 족적을 남겼던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일부다. 90년대에 유일하게 외운 시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세월의 영락과 함께 기억의 골짜기로 사라져 가는 시이기도 하다.
세시에 집에 온 것은 어쩌면 일찍 온 것이다. 더 이상 그 자리를 버티지 못하고 몰래 야반도주하듯이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한 동네 사는 사람들이건만 그들과 내 삶에서 오는 어떤 이질감이나 괴리감이 자리하는 것 같다.
저녁마다 배드민턴에 흠씬 취해 산다. 벌써 4년에서 5년 운동을 하고 있는데, 마라톤과 테니스, 수영, 축구, 골프 많은 운동을 해보았지만 배드민턴처럼 혼을 빼놓는 운동은 없었다. 게임을 할 때는 마치 신들린 무당처럼 포효하는 사자처럼 온 몸이 흥건한 줄주머니가 되도록 운동을 하고는 한다.
그 날도 그랬다. 운동이 끝나고 누군가 막걸리 한잔 하자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말 그대로 간단히 막걸리 한잔하면 될 거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늘상 그래왔던 것처럼 일정한 시간이 지난후에 늦었다면서 먼저 자리를 일어나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투박한 막걸리 잔이 오고 가고 2명이 합류되면서 분위기는 이상하게 당구 치는 쪽으로 고조되어 갔다. 저마다 당구를 몇치냐면서 타인의 실력을 가늠하기도 했고 편을 짜기도 했다. 마침내 횟집으로 당구내기를 치자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이태원에 사는 강민씨가 300 으로 제일 높은 다마수였고 그다음에 총무가 250, 내가 120, 그리고 100짜리가 있었다.
과거 나역시 200 까지도 쳤었지만 알콜다마는 서로가 지리멸렬하기 때문에 나중에 치다보면 누가 이기고 지는 승부수 보다도 그저 빨리 끝내거나 끝내주기를 바라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날도 다마수를 낮추고 쳤는데도 1시간 20여분이 지나서야 끝나고야 말았다. 그것도 120을 놓고 친 내가 거의 다 쳐서 이길 수 있었다.
12시를 넘긴 시간에 동네 횟집은 문을 닫았다. 그런데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이태원에 나가자고 성화다. 이태원은 그닥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택시 한대로 장성 5명이 볏짚단처럼 붙어서 이태원에 도착했다. 12시 30분을 넘긴 시간이지만 이태원은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거리에서는 이국 남자들과 한국여자들로 보이는 긴머리, 늘씬하게 쭈욱 빠진 미니스커트의 여자들이 유독 시선을 끌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났다. 허름한 횟집에서 우럭 회와 시사모를 시켰다. 테이블에는 술병이 나부끼고 있었다. 술집을 나온 시간은 2시를 넘고 있었다. 또 다시 맥주 한잔 할 요량으로 술집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이 늦어서 집에 가겠다는 나를 완강하게 팔짱을 끼면서 붙잡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선택의 조건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데서 완강하거나 굳건하게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술집에 가서도 언제든지 빠져 나올 수 있는 기회는 있기 때문이었다.
이태원이어서 그런지 무슨 바같은데였는데 술집이 이국적으로 와닿았다. 포켓볼 다위가 한 켠에 있었다. 한쪽에서는 술잔을 기울이고 한 쪽에서는 포켓볼을 치고 있었다. 총무하고 낯선 여자가 포켓볼을 쳤다. 늘씬한 키에 연예인을 뺨치면서 눈매가 서글서글한 낯선 여자. 그 여자는 총무가 멋진 샷을 구사할 때마다 나이스 하면서 당구대 다위를 가볍게 몇번씩 터치하고는 했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그 여자, 술집 종업원도 아니고 저 여자는 이 깊은 야시에 무엇하러 여기왔을까. 포켓볼 치는 솜씨도 여간내기가 아니다. 혼자왔던 것일까. 동료가 짓궂은 말을 걸자 '저도 여기 손님으로 왔거든요?' 하면서 싫은 내색없이 살포시 미소를 짓고 사라지던 그 여자.
동료 둘이 포켓볼로 술내기를 하자고 할 때 나는 조용히 술집을 빠져나왔다. 시간은 3시를 넘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