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what you love. Love what you do."
- 어느 TV 광고 카피 , 광고 상품은 기억이 나지 않는 -
언젠가 어느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녀가 하고있는 일을 이렇게 부르는 걸 당사자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무명에 가까운지 몰라도 언젠가 꼭 좋은 작가가 될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감수성과 상상력이 풍부하고, 솔직담백하면서도 언제나 맛깔스러운
그녀의 일기장의 글들을 읽는 건 내겐 상당히 즐거운 경험이었다.
기억에 남는 말들 중에, 정확히 옮길 수는 없지만 이런 말이 있었다.
나는 예술가다. 글을 쓰는 일을 통해 한푼도 돈벌이를 못하고 있다고 해도
나만이 쓸 수 있는 나만의 글을 단 몇 줄이라도 쓰고 있는 한 나는 예술가인 것이다.
제대로 옮기질 못해서 인용부호도 못붙이겠다.
요는, 이런 식의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 규명이 나에겐 퍽 인상적이었고,
너무 거창하게만 보여 나로선 아예 시도도 안해봤을 일이건만,
그러니 당신도 한번 부담스러워 말고 자신이 뭐하는 사람인지 자문해보고 답도 해보라고
넌즈시 권하는 말인 양 들렸던 것이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듯,
특별히 잘하는 일이나 재능 같은 게 없다.
그럼 남다른 끈기나 노력이 있냐 하면, 그것도 턱없이 부족하다.
자신감이나 의욕... 역시 상실한지 오래다. 몇번의 실패가 있었다는 게 핑계라면 핑계랄까.
나같은 사람에겐 그래서 좋아하는 일,
그러니까 별다른 재능이 없어도, 남다른 끈기가 없어도,
그저 밥을 먹듯이 물려하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이 제격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때가 되면 별생각없이 꾸역꾸역 일망정 뭔가를 쳐넣어도
별탈없이 속에서 받아내 줄 수 있는 그런 일 말이다.
그런 일이 하나... 있긴 하다.
십년 넘게 흥미를 잃지 않고, 그런대로 꾸준히 해오고 있는 일.
무엇 하나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분석하고 가설을 세우고 검증을 하고 나름대로 이론을 세우는 일.
글쓰는 소질이 없어서 거기서 난관에 봉착할 게 뻔하긴 하지만, 언젠가 그 결과물들을 찬찬히
글로 옮겨 나중에 작은 책이라도 엮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요즘들어 좀 난데없지만
하게된 것도 사실이다.
그럴 가망 없이 단지 나만의 사적인 기록으로 남는다 해도 별로 아쉽지 않을 것 같다.
어쨌건 내게도 나만이 할 수 있는 나의 일이 있는 것이고,
나의 그것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분석하고 설명하고 기록하고 있는 한,
내 보잘 것 없는 기록이 빛을 보게 되건 말건 그런 것과도 아무런 상관없이
나는 과학자인 것이다.
(나의 연구대상은 언어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어라는 언어에 국한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