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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조회: 2434 , 2010-01-31 16:32

구청 도서관에서 빌려온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하루를 보내다.

몇년만에 다시 읽은 셈인데, 
독자를 끊임없이 킬킬거리게 만드는 입심에 새삼 감탄하고
<프로세계>의 정체엔 절절히 공감하지만,
박민규가 제시하는 전망은 이미 <신자유주의>의 완강한 그물에 포획된 우리에게 참 아득하다.


기억할만한 구절들------------------------------------------

평범한 야구를 했던 삼미 슈퍼스타즈. 
이 얼마나 적확한 표현이란 말인가. 그러나 거기서 파생하는 또
하나의 의문. 확실히 평범한 야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삼미는
그토록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팀으로 모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걸까. 그것은 아마 기록과 순위의 문제 때문이겠지, 라고 나는 생각
했으나 곧 평범한 야구라면 최하위를 기록할 이유가 없다는 쪽으로
다시 생각의 흐름이 바뀌어갔다. 평범한 야구란 6개의 팀 중에서
3위나 4위를 달리는 팀의 야구를 일컫는 말일 테지. 그럼 왜?


결론은 프로였다.


평범한 야구 팀 삼미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
이었다. 고교야구나 아마야구에 있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을 팀
이 프로야구라는-실로 냉엄하고, 강자만이 살아남고,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며, 물론 정식 명칭은 ‘프로페
셔널인 세계에 무턱대고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평범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비록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인생이라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삶이 될 것
이라 나는 생각했다.


큰일이었다. 세상은 이미 프로였고, 프로의 꼴찌는 확실히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프로야구 원년의 종합 팀 순위로
그 것을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6위 삼미 슈퍼스타즈:평범한 삶
5위 롯데 자이언츠:꽤 노력한 삶
4위 해태 타이거즈:무진장 노력한 삶
3위 MBC 청룡: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한 삶
2위 삼성 라이온즈:지랄에 가까울 정도로 노력한 삶
1위 OB베어스: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 노력한 삶


아아, 실로 무서운 프로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고 16살의 나는 생
각했다. 그럼 평범한 삶보다 조금 못하거나 더 떨어지는 삶은 몇 위
를 기록할 것인가? 몇 위라니? 그것은 야구로 치자면 방출이고, 삶
으로 치자면 철거나 죽음이다. 그런 삶은 순위에 낄 자리가 없다. 평
범한 삶을 살아도 눈에 흙을 뿌려야 할 만큼 치욕을 당하는 것이 프
로의 세계니까.


  찬찬히, 나는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위의 순위는-그
래서 우리 모두에게 일종의 최면처럼 거대한 오해와 착시를
유발한다. 위의 순위를 다시 성적순으로 나열해보자면-


  1위 OB베어스
  2위 삼성 라이온즈
  3위 MBC 청룡
  4위 해태 타이거즈
  5위 롯데 자이언츠
  6위 삼미 슈퍼스타즈


아무리 봐도 3위와 4위가 그럭저럭 평범한 삶처럼 보이고 6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최하위의 삶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프로의
세계다. 평범하게 살면 치욕을 겪고, 꽤 노력을 해도 부끄럽긴 마찬
가지고, 무진장,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해봐야 할 만큼 한 거고, 지랄
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 '좀 하는데' 라는 소리를 듣고,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의 노력을 해야 '잘하는데' 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꽤 이상한 일이긴 해도 원래 프로의 세계는 이런 것이라고
하니까. 
                 -  125쪽 ~ 127쪽 -




1. 이젠 프로만이 살아남는다: 당시 가장 많이 회자되던 프로복음
1호 되겠다. 프로가 안 되면 아마 죽을 거라는, 최후의 통첩이 실린
무게 있는 복음 이다.


2. 난, 프로라구요: 과거의 삶을 회개하고, 앞으로는 잔업이든 휴
가 반납이든-아무튼 불꼿 같은 프로의 삶을 살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뚜렷이 공고한 프로복음 2호 되겠다. 한편 당돌해 뵈면서도 목숨
의 부지를 위한 비장한 각오와 잔잔한 애수가 서려 있는 복음. 과거
유신복음 중에는 같은 맥락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있다.


3. 프로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 아닙니까?: 주로 비열한 방법
으로 목적을 이룬 자들이 내뱉던 프로복음 3호 되겠다. '동물의 왕
국'을 인간의 삶에 적용시킨 친(親)환경주의, 동물애호주의의 복음.
이 복음을 토대로 어쨌든 이기면 된다, 어쨌든 돈말 벌면 된다는 새
로운 세계관이 빠르게 형성될 수 있었다.


4. 하루빨리 프로가 되게: 주로 회사의 상사들이 신입사원들에게
쓰던 프로복음 4호 되겠다. 쉽게 말해, 할 일이 태산 같다는 말이다.


5. 허허, 이 친구 아마추어구먼: 미전향 아마추어들에게 전도의
목적으로 쓰이던 프로복음 5호 되겠다. 가벼운 멸시와 조롱을 담아서
그들의 전향을 유도한다.


6. 맛에도 프로가 있습니다: 요식업계를 통해, 민간에서 처음으로
창출된 프로복음 6호 되겠다. 거창한 문구로 위장해 있으나, 그 어원
은 '옆집보다 우리집이 맛있어요'라는 소박한 것이다.


7. 이러고도 프로라고 말할 수 있나?: 주로 실수를 범한 부하직원
에게 상사가 내뱉던 프로복음 7호 되겠다. 쉽게 말해, 나가 죽으라는
말이다.


8. 프로의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이다: 아직 멀었다. 더 높은
경지의 프로 세계가 있으니 분발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프로복음 8호
되겠다. 주로 대학교수나 무슨 연구소의 소장이란 사람들의 입을 통
해 개발도상국의 최대 급소인 무식(無識)의 혈을 찌른 고급 복음이
다.


9. 프로는 끝까지 책임을 진다: 아마추어 음해와 더불어 야근의
생활화 고착을 목표로 한 프로복음 9호 되겠다. 이후 아마추어는 책
임감이 없다는 사회적 무의식과 야근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기업 풍
토가 널리 확산된다.


10.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한국 경제사에서 여성 고급
인력의 필요성이 대두될 때 나온, 그러나 여성 고급 인력의 필요성
과는 아무 상관 없는 프로복은 10호 되겠다. 역시 거창한 문구로 위
장해 있으나, 그 원래의 뜻은 '옷 사세요'라는 말이다.


11. 프로주부 9단: 자칫 느슨해지기 쉬운 주부들에게 그럴 틈을 주
지 않기 위해 만든 프로복음 11호 되겠다. 주부가 앞장서서 살림도
프로로 하고, 애들도 프로로 키우라는 거시안적 포석이 깔린 복음.


                                         -  77쪽 ~ 78쪽 -



클로저   10.02.01

저도 이 책 예전에 봤는데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란 말이 잊혀지지 않네요..

티아레   10.02.01

책읽으면서 그렇게 웃어본 건 처음이었어요.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받기 힘든 공은 받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멋진 구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