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영화처럼, 영화는 삶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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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근년 들어 조금씩 밝아지면서 새로운 면모를 드러낸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는“1995년 첫 영화를 찍을 때와 지금의 내가 다르듯이 내 영화도 달라지는 것일 것”이라며“그러나 뭔가 다르게 만들겠다는 의지 같은 건 없다”고 말했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
스태프 4명, 5000만원… '옥희의 영화' 찍은 홍상수 감독
현장 쪽대본, 노개런티 배우들 제작비 줄인 만큼 '자유'는 늘어…
흥행? 수상? 나한텐 아무 의미 없다… 영화 찍는 두어 달의 사랑, 그게 목표
아내가 남편을 "영수씨!" 하고 부른다. 남편 이름은 진구다. 아내는 영수가 누군지 말하지 않는다. 대학교수는 신임 교수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지만 부인한다. 유부남인 영화감독은 '왜 다른 여자를 사귀다 내팽개쳤느냐'는 질문을 받고도 해명하지 않는다. 세 가지 의혹 중 어떤 것도 풀리지 않은 채 영화가 끝난다.
4개 장으로 이뤄진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옥희의 영화' 첫 장 '주문을 외울 날'의 내용이다. 예술영화는 머리가 아프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홍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영화를 보면 그걸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사람, 계속 '이거 주제가 뭐지?' 하는 사람은 약간 이상한 사람이에요. 누군가에게 '왜 그 여자를 사랑해?'라고 물으면 '발목이 예뻐' 또는 '착한 것 같아'라고 말하잖아요. 그게 아니거든요. 수천 개의 어떤 것들이 작동을 해서 그 여자에게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말로 정리해요?" 그렇지.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한단 말인가. '예술영화 관람 후 편두통'에 대한 명쾌한 처방을 받은 느낌이었다. 그는 "누구나 어떻게든 내 영화를 해석할 수 있고, 그렇게 다양한 관객들의 반응을 듣는 것으로 내 영화는 완료된다"고 말했다.
지난 16일 서울 신사동 한 카페에서 만난 홍상수(50) 감독은 조리 있게 말하기보다 토해낸 말들 속에 진심이 덩어리째 담겨 있는 쪽이었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한 뒤 지금까지 11편의 장편 영화를 발표했다.
"초기엔 2년에 한 편 내놓더니 점점 영화 찍는 속도가 빨라져 요즘엔 1년에 두 편을 찍는 셈"이란 말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뻥하고 빈 느낌이에요. (영화 말고는) 할 게 없어요. 시간이 떡 버티고 서 있는데 아무 할 일이 없는 거예요. 제가 영화 만드는 걸 무척 좋아하고, 영화 찍을 때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제게 흥행은 의미가 없어요. 영화 찍는 두어 달간의 경험에 대한 사랑, 그것이 최고의 목표예요." 그의 말투는 사뭇 다급했다. 마치 '영화 대충 찍는 행위에 대한 처벌법' 위반 혐의로 억울하게 입건된 사람 같았다. 그는 "미안합니다. 별것도 아닌 얘기를 이렇게 해서"라고 덧붙였다. 기묘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여행도 안 하고 취미도 거의 없다고 했다. 예전엔 주 5~6일 술을 마시며 '시간을 낭비'했지만 요즘은 2~3일로 줄였다.
"무엇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느냐"는 질문에 바로 대답이 나왔다.
"생활 속에서 느끼는 모든 것에서 영향을 받아요. 조금 전 이 카페에 있던 한 손님이 제 집사람 친구였나 봐요. 저를 알아보고 집에 전화해서 '네 남편 여기 있다'고 하고는 저를 바꿔주더라고요. 이런 에피소드 재미있잖아요." 과연 홍상수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상황이다. 그러니 그에게 삶은 영화처럼, 영화는 삶처럼 맞물리며 굴러간다. '홍상수 영화'의 비밀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허구적인 것, 이데올로기, 거대 담론, 잘 짜인 수사로 현혹하는 말, 지식인이 기막힌 논법으로 만든 시스템, 미래를 약속하는 말들, 그런 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깨부수는 것은 가까이 있는 것을 집중해서 보는 거예요. 계속 집중해서 보면 새로운 구체(具體)를 느낄 수 있어요. 그게 큰 덩어리를 왕창 깰 수 있거든요." 홍상수의 영화는 그러므로 반작용이요, 운동(movement)이다. 이제껏 모르고 그저 킬킬거리며 그의 영화를 봐왔으니 낭패다.
'옥희의 영화'는 애초 단편으로 찍을 생각이었다. '이선균이 중심인물이고 겨울 스케치 찍듯 만들 영화'라는 것 말고는 정해진 게 없었다. 조연으로 문성근을 섭외했고, 한 편을 찍으니 욕심이 생겨 정유미를 추가 섭외했다. 그렇게 짧은 영화 세 편을 찍으니 '장편의 기준'인 80분에 미달했다. 문성근을 주인공으로 하루 만에 한 편을 더 찍었다. 늘 그렇듯 다들 노개런티로 출연했다. 지난 겨울 스태프 네 명과 함께 13회차에 걸쳐 완성했다. 5000만원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찍는 게 저에게서 좋은 걸 끌어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초기 세 편만 해도 완전한 시나리오가 있었어요. 그런데 현장에서 자꾸 고치게 되고, 그 비중이 점점 늘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매일 현장에서 대본을 쓰는 방식으로 바꾼 거죠."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이지 않은 이번 영화를 그가 '청소년 관람 불가'로 자청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그는 "예전부터 늘 청소년은 내 영화를 안 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청소년이 제 영화를 봐야 뭘 느끼겠어요? 제 영화는 인생의 한 사이클을 산 사람, 20대 후반은 돼야 볼 수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죠."
홍 감독은 칸영화제에만 6차례 초청받았다. '옥희의 영화'는 올해 베니스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해외 영화제의 관심이 창작에 격려가 되느냐"는 질문에 그는 거의 화를 내다시피 했다. "전혀 아닙니다. 영화제란 게 너무 가변적이고 어떤 가치 기준도 제시하지 못해요. 그게 무슨 제 영화에 대한 평가가 되겠어요. 작은 시네마테크(예술영화관)에서 만난 어떤 사람이라도 제가 보기에 훌륭한 사람이 제 작품을 칭찬하는 것이 제겐 최고의 칭찬입니다."
돈(흥행)이나 명예(영화제 수상)는 전혀 안중에 없는 듯했다. 그는 "영화를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제작비를 계속 줄여 왔다"며 "그 자유를 포기하는 순간 맛이 가는 것"이라고 했다. 역설적으로 왜 칸을 비롯한 세계 영화제가 홍상수 영화를 사랑하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옥희의 영화'는… 교묘하게 서로 얽혀있는 네 가지 이야기
단편 영화 네 편을 묶어놓은 듯한 '옥희의 영화'(16일 개봉)는 이른바 옴니버스 영화가 아니다. '주문을 외울 날', '키스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 네 편은 각각 독립적이지만 교묘하게 서로 얽혀 있다. 이선균·정유미·문성근 세 배우는 비슷한 듯 다른 역할을 맡아 '어느 겨울 대학 영화과에서 생긴 일'이란 범주 내에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이끈다. 홍상수 감독은 이 영화에서 삶에는 어떤 공식도 없으며 누군가를 정죄(定罪)하거나 심지어 무엇을 예상하는 것조차 부질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첫 장 '주문을 외울 날'에서 각각 다른 사안으로 궁금증(또는 의혹)을 일으키는 인물들이 아무런 해명 없이 퇴장하는 것이 그렇다. 여자는 자신의 '니콘' 카메라를 '나이콘'이라고 말해서 남자의 웃음을 산다. 그러나 남자가 'Nikon'의 미국식 발음이 그렇다는 걸 알았다면 대답이 달라졌을 것이다.
'키스왕'에서 진구는 자신의 영화가 상을 받을 것이라는 소문을 무성하게 들으며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지만, 정작 상을 받지 못하자 낙심한다. '수상 유력'을 일축하는 그와 낙심하는 그는 동일인이다. 이것이 홍상수식 부조리의 묘사다.
4장 '옥희의 영화'는 나이 든 남자, 젊은 남자와 각각 데이트했던 여자의 이야기를 병렬로 표현했다. 나이 든 남자의 뒷모습은 쓸쓸하지만, 여자는 끝내 자책하지 않는다.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궁무진한 동시에 전혀 없기도 하다. 그런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 자체의 중량감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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