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아무리 가까운 관계가 되고 아무리 많은 대화를 해도 A가 말하는 C라는 경험에 대해, B가 A만큼 느낄 수는 없잖아요? 재떨이를 달라고 하면 재떨이를 건네주는 행동처럼, 언뜻 우리는 같은 리얼리티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죠. 하지만 실은 서로에게 약간의 접점이 있을 뿐, 더 큰 부분은 각각 자신의 세계 속에 갇혀 있다는 거예요.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인간살이가 지닌 비극의 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상대에 대해 스스로를 열고, 고정된 이미지에서 탈출하려는 노력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결국 소통할 때 우리는 서로 다르니까요. 물론 서로 다르다는 사실 속에서 쾌감도 있어요. 우리가 모두 다 똑같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가 뭔가를 의미하면 만인이 그 뜻을 다 아는 그런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다름을 찬미하는 것조차 실은 다르다는 사실 자체에서 오는 괴로움을 다른 데서 오는 기쁨으로 보완하려는 것일 수도 있어요. 결국 삶의 비극은 서로가 다를 수 밖에 없다는 데에 근본 원인이 있는 것 같아요.
-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그 영화의 비밀, 홍상수 편 p.135~136
우리가 상대에게 스스로를 열고 소통을 시도하는 것,
접점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건 값진 일일거야.
노력해서 만들어낸 접점이 갇혀서 살고 있는 각자의 세계에 비해
비록 작은 부분이라고 해도 그래.
결과적으로 처음 기대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지점에 이르게 되거나
의미가 명확해지기보다는 또 다른 의문과 맞닥뜨리게 되고 혼란만 가중된다고 해도
그건 의미있는 진일보야.
결국 소통했다고 느끼는 순간조차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된다고 해도... 역시 그래.
그런 경우, 그건 내가 상대에 대해 갖고 있거나 바라고 있던 고정된 이미지와
거기에서 벗어나길 저항하는 내 자신의 편견이 문제인 거지,
사실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해왔을 타인의 내면 세계와 그에 따른 그의 삶의 괘적에 대해
내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을까.
다만 나와의 접점을 만들어내고자 자신을 열고 드러내 보여준 상대의 노력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한 거야.
이해받고 싶다는 바람과 내가 이해해주리라는 믿음을 표현한 거잖아.
간혹 상대의 의외의 모습에 다소 놀랄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 걸려 주저하고 물러나 버린다면
더이상 관계의 진전이란 있을 수 없고, 그나마 내게 열었던 마음마저 닫고
그 자신의 내부로 숨어버리고 말게 되겠지.
따라잡기위해 시간이 좀 걸릴 뿐 이해해보고자 하면 이해 못할 일이 얼마나 있겠냐구.
상대가 내게 중요한 존재인가의 여부는 내가 이런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느냐에 달린 거야.
내게 필요한 존재니까, 더 많은 접점을 만들어 소통하고 싶고 그 접점을 더 확장해나가고 싶으니까,
결국 나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하는 거야.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러한 노력을 지속하기도, 만족을 얻기도 어려울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타인을 필요로 하고 소통을 끊임없이 갈망하는 결핍된 존재라는 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그게 '인간살이가 지닌 비극의 근본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밀고나갈 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