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5027 , 2012-03-09 13:36 |
자아의 이중구조
인간은 “아폴론적 자아”와 “디오니소스적 자아”라고 일컬어지는 두가지 자아, 즉 이중자아(the double self)를 가지고 있다고 하죠.
아폴론은 태양의 신이잖아요. 태양, 빛, 진리가 상징하는 것처럼 아폴론적 자아란 이성, 지식, 자의식과잉, 명철함, 개별성을 특징으로 하죠.
디오니소스(박카스)는 술의 신이고, 디오니소스적 자아란 본성, 쾌락과 도취, 잔인성, 자연의 생성력, 자의식과잉의 정반대인 무아경, 무의식으로 빠져드는 체험 등과 관련이 있죠.
아폴론적 자아의 역할이 명철한 이성으로 철저히 개별성과 명징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거라면, 디오니소스적 체험이란 나 자신과 외부의 경계가 사라지는 지점까지 밀고나가서 경험하는 자아상실, 무아경, 자연과의 합일 등이라고 해요.
아폴론, 이성, 코스모스(우주적 질서) VS. 디오니소스, 본성, 카오스(혼돈)
우리가 사는 세계(코스모스/ 카오스)도 그렇지만 우리의 내면 세계도 다이네믹한 변화를 끊임없이 겪으며 이 두가지 양극단 사이 어디쯤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봐야죠.
평상시엔 이성적 자아로 본성적 자아를 억누르거나 적절히 조절하면서 살지만, 본성적 자아가 무의식중에 튀어나오기도 하잖아요. 술에 취한 상태나 성관계시의 자아상실, 무아경의 체험 같은 예가 있겠죠.
하나양이 말한, 본성적 자아가 느끼는 감정이나 욕구를 이성적 자아가 그것의 원인을 분석하고 체크하면서 마음과 행동을 교정하는 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일 거예요.
흥미로운 건, 어떤 궁극의 것(‘진리’, ‘대자유’ 같은)을 추구하는 방식에서 이 두 양극단 중 어느 한쪽 극단으로 치닫는 경향들이 있다는 거죠. 진리에 도달하고자 본성을 죽이고 금욕과 고행을 실천한달지, 그와는 반대로 신비적 체험이나 우주적, 자연적 합일을 통해 진리에 포섭되고자 자아를 놓아버리고 무아의 상태에 이르고자 한다든지.
그런데 이 두 자아 중 어느 것이 더 본연의 자아일까요.
아마도 항상 존재하는 자아가 아닐까요. 술에 몹시 취한 상태나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하는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교육된 자아, 도덕적인 자아, 이성적으로 훈련된 자아는 우리가 자아를 놓아버리는 상태에서는 숨어버리잖아요. 디오니소스가 ‘자연의 생성력’을 다스리는 신으로 그려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일 거예요.
우리는 ‘자의식과잉’과 ‘무의식’의 양극단 사이의 어느 구간을 왔다 갔다하며 균형을 잡고 살고 있을 거예요. 어느 쪽으로 더 치우쳐 있냐에 따라 아폴론적 유형, 디오니소스적 유형으로 나뉘기도 하구요.
자의식과잉 상태가 지속되면 긴장되고 피곤한 자신을 느끼겠죠. 그럴 땐 긴장과 피곤을 풀기위한 자신만의 취미나 여가활동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고삐를 죄고 달리다가도 때론 고삐를 느슨하게 풀고 쉬기도 해야하니까.
디오니소스적 자아에 충실해서 사는 사람들에겐 분명 여유로움과 솔직함, 자연스러움이 느껴지죠.
자신의 디오니소스적 자아를 부인하지도 너무 억압하지도 않고 적절히 돌보면서 사는 것도 지혜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李하나
12.03.09
음 저는 약간 아폴론적 자아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 같아요. 뭐랄까, 스스로의 디오니소스적 자아를 믿을 수가 없어요. 꼬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순수한 디오니소스적 자아가 아니라 어딘가 뒤틀어지고 오염된 디오니소스적 자아가 계속해서 흘러나올 거라는 생각에, 아폴론적 자아가 계속해서 눈을 부릅뜨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거지요. 아직은 조금 불안해요. 뭔가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그 일'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 일을 잘 치료하고 나면, 제 디오니소스적 자아를 인정해줄 수 있겠지요?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바나나우유처럼달콤한
12.03.11
저는 디오니소스적 자아가 더 본연의 자아가 아닐까 싶어요 |
티아레
12.03.11
맞아요. 제 얘기도 그거였어요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