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야 안녕   치유일지
  hit : 2397 , 2013-03-12 21:42 (화)


개강 후에 힘들었던 것들이
정리되는 느낌이다.
사실 개강을 한 후에 많이 심란했다.
외롭기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데 잘 어울리지도 못하겠고
낯설고
싫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성폭행 피해자여서
그런 것이라 생각해서
많이 괴로웠다.
그저께는 한숨도 못 자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했다.



.
.

그런데 오늘,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서있는데,
문득 어떤 생각이 내 머리를 때렸다.

준거집단과 소속집단, 
이라는 개념들.




.
.


사회학에서
준거집단은 개인이 행위의 기준으로 삼고 있고, 
속하고 싶어하는 집단을 의미한다.
소속집단은 개인이 현재 속해 있는 집단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람은 준거집단과 소속집단이 일치하지 않을 때
즉,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과 자신이 속하고 싶은 집단이 다를 때
괴로워진다, 
라고 사회학에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나 또한 개강 이후 
이 준거집단과 소속집단 사이의 괴리로 힘들어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강을 했는데
내가 친해지고 싶은 친구들과는 친해질 수가 없었다.
친해질 기회도 별로 없었고
1년 동안 학교에 오지 않았던 터라서
모르는 얼굴이 많았다.

내가 친해지고 싶은 친구들은
자신감 넘치고 활달한 친구들.
술도 마시고 친구도 많고
다양한 활동들을 하는 생기 넘치는 친구들이다.
나는 그 친구들이 정말 부러웠다.
그래서 그 친구들과 친해지고 싶은데
내 친구들은 다들 조용하거나
차분한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싫었나보다.
그래서 외로웠던 건가보다.
무슨 성폭행을 당해서 사람에게 마음을 열 수 없다느니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내가 사람들을 속이는 것 같아서
사람들하고 친해지고 싶지 않다는
그런 이유도 아니었다.

난 그냥 
내가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이랑
친해지고 싶었던 것 뿐이다.

사실 그 친구들하고도 마음만 먹으면 
친해질 수는 있긴 하다.
휴학하기 전에 휴학생의 신분으로 OT를 갔었기 ‹š문에
이미 안면은 다 텄고,
친한 후배도 몇 명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솔직히 걔네들이랑 나랑 성향이 좀
다르긴 해서
같이 있으면 편하지만은 않기 때문에
다시 친해질까 말까 고민하기도 했다.

친해지면 재밌긴 한데
진짜 친구라는 느낌이 드는 애가 별로 없어서.
그리고 걔네랑 노는 코드를 맞추기도 힘들어서.
사실 춤추고 노래하고 술먹고 토하는 데는
재능도 흥미도 별로 없으니까.

소속집단에 애정을 갖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내가 편안한 곳.
나랑 맞는 곳은 이 친구들이다.
이 친구들이랑 있으면 조곤조곤 할 이야기도 많고
편안하게 속 이야기도 할 수 있고.
나는 원래 이렇게 작고 조용한 사람이다.
시끌벅적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고 싶어서 억지로 노력했더니
뭔가 거부반응이 온 듯 했다.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의 친구들이 나의 친구들이라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더 이상 내가 바랐던 그 아이들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친구들이 더 보고 싶어졌다.



.
.



이 개념을 조금 확장시켜보면
준거상태와 소속상태,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상태
그리고 지금 나의 상태.

이 둘이 다르면 사람은 불행해진다.
지금의 내 모습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니까.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그토록 괴로웠나보다.
내가 바라는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이 달라서.

그런데 문제는
나는 어떤 상황이 되든 그렇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나의 준거 상태는 개강이었고
소속상태는 아르바이트였다.

나는 일 하는 것을 싫어했고
개강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학교를 다니고 싶었다.

그런데 개강하자마자 
또 뭔가가 불만이라고
개강한 것을 기뻐할 틈도 없이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토록 개강을 바라던 나의 모습은 까맣게 잊은 채로.

기억했으면 좋겠다.
지금 내 생활은
불과 2주 전의 내가 그토록 원하던 생활이라는 걸.

내가 개강하기를,
학교에 다닐 수 있기를
지금 이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자유로운 시간이 오기를.
내가 나를 위해 하루를 쓸 수 있는 그런 날.
국장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돈을 위해 하루를 바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시간을 얼마나 원했던가.

그런 날이 왔다.
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 잘 수도 있고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나를 위해 공부를 하고
여유롭게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나를 위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그리고 원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데,
이 시간을 얻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만끽해야 하지 않겠나.

소중한 시간들이다.
내가 얻어낸 시간들이다.



언제나 명심했으면 좋겠다.
소속상태와 준거상태를 너무 분리시켜 놓지 말자고.
소속상태를 인정하자고.

나는 지금 이렇다.
성폭행을 당한 아이.
사실 이 생각이 가장 크긴 하다.
인정한다.
나는 성폭행 당했다.
근데 뭐.


이렇게 살아가는 거지.



.
.



머리 속에서 한 가지 메시지가 들려왔다.







The clock starts to go.





째깍
째깍
째깍



.
.



과거에 멈춰 있던 내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
.




과거를 잊지 말아라
과거를 해결하고 넘어가라
과거를 직면하라

성폭행 치유서에서 빈번히 권유하는 이것.
과거 해결.

나는 
그것이 과거에 묶여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하니
과거와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과거와 너무 멀어지면 잊어버리게 될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과거 가까이에 있어야겠다.
멀리 가지 말아야겠다.

그래서 
시계를 돌리지 않았다.
시간을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를 잊지 말라는 것은 
과거에 얽매여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과거에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이 자리에서
그 때를 다시 바라보라는,
지금의 내 입장에서
그 때를 '재해석'하라는 의미임을.

여전히 7살의 나로서가 아니라
여전히 8살의 나
여전히 16살의 나
여전히 20살의 내가 아니라


22살의 하나의 눈으로
22살의 하나의 입으로
바라보고 해석하고 이야기하라는 것.


과거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나는 갈 길 간다.
그리고 내가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다시 이야기해보라는 거다.


언제까지나 과거에 살라는 의미가 아니라.




.
.





친구가
자신이 아끼는 물건을 보여주며
'이거 잊으면 안 돼'
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나는
언제까지고 그 물건 옆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 물건만 기억하면 되는 것이다.
사진을 찍어도 좋고
기록을 해둬도 좋고
머리 속에 남겨둬도 좋다.

굳이
언제까지나
그 옆에서 움직이지 않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과거도 마찬가지.
과거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존재하니까 존재한다.
이미 일어났기에 그 자리에 있다.

그러니 
나는 그저
그것에 대해
기억하거나
기록해두기만 하면 된다.

언제까지고 그 옆에 서서
안절부절 못하고
어서 와서 내가 이걸 잘 맡아두고 있다는 걸
검사해주세요,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
.



나는 간다.
나는 이제 살아도 된다.
22살이면 
22살의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면 되고
23살이면 23의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면 된다.

그 때 그 때
내 삶에서
그 때의 나의 입으로
내 과거에 대해 말하리라.

내 입장에서.
그 과거와는 이미 멀어져버린
22살의 하나의 입장에서.




.
.



지하철에 앉아 있는데
여기까지 결론을 내리고 나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아주 자유롭게
가슴까지 들썩이며
폣속 깊이까지 숨을 들이쉬었다.







뚫린 느낌.





풀려났다.
나는 이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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