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 troi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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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계속 사회과학을 공부할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이 많다. 사실 지금 내가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있는지조차도 제대로 모르겠다. 그냥 '사회과학부'에 다니고 있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기도 하다. 입학할 당시만 해도 사회과학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내가 여기에 온 건, 그냥 이 '학교'에 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짜 공부라는 것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다른 대학에 가서는 진짜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어떻게 공부할 것이냐'와 '무엇을 공부할 것이냐' 사이에서 고민했다. 그러다가 '어떻게 공부할 것이냐'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돼서, 이 학교에 있는 과 중에 그나마 내 성향에 맞다고 생각하는 사회과학부를 선택했었다. 많은 것을 배웠다. 학자들이 하는 말은 다 사실인 줄 믿고, 언론이 하는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믿었던 고분고분하던 내가, 그 모든 것들에 의심의 날을 들이댈 수 있게 되었다. '진짜라고 믿고 있는 모든 것이 사실은 거짓일 수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증명해보려는 노력, 그리고 그렇게 증명되 진짜 사실들은 나를 조금 더 자유롭게 해주었고, 나 자신을 찾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저마다의 생각을 갖고 중심 잡고 살아가는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많이 느꼈고, 배웠고, 성장했다. 애초에 내가 얻고 싶었던 것을 얻게 된 이 시점에서, 내가 계속해서 이 곳에 있을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내가 '공부'라는 것을 하는 이유는, 자유롭고 싶어서이다. 나 자신에게서,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나를 얽매고 있는 나의 과거와 성장배경으로부터. 그 시간들이 만들어낸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를 얻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나 자신을 성찰하고, 고통 속으로 밀어 넣고, 무섭기만 한 사람들 속에 있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조금 더 명료하고 객관적으로 나를 인식하기 위해 학문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 나의 일상에 가장 실용적인 학문은 심리학이다. 당장에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에 대한 1차적인 답을 준다. 공부할 내적 동기가 충분하다. 그러나 사회과학은 잘 모르겠다. 솔직히 나는 사회과학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과학부 때문에 여기에 있는다.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게 만드는 사람들과 주변 환경들, 그리고 그러한 고민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고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는 안정감을 나에게 주는 곳. 그래서 내가 마음 놓고 성찰할 수 있게끔 해주는 곳. 그래서 나는 바라곤 한다. 아, 딱 이런 환경 속에서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을 공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데카르트, 재미없다. 내가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주지도 못한다. 필요해서, 호기심이 일어서 공부하는 게 아니라 공부해야 하는 것이어서 공부하다보니 이런 저런 장점도 있구나, 하는 정도. 사회과학의 메리트는 역시 '의심'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는 것. 특히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라 권위에 길들여지고, 공포심을 학습한 내게 이 '삐딱한 시선'은 굉장히 중요하고 소중하다. 그런데 이 삐딱한 시선을 찾아보기가 쉽지가 않다. 이것이 이렇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환경을 찾기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내게 이 환경은 아직 필요하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잘 하는 일을 하고 싶기도 하다. 내가 내적 동기를 갖고, 지적 호기심과 즐거움을 가지고 공부할 수 있는 학문은 심리학이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일단 현재까지는. 그런데 중요한 건 아무리 그런 재미있는 심리학이라도, 또다시 예전과 같은 방법으로 공부하고 싶지는 않다. '학점'을 위해서라거나 '취업'을 위해서라거나, 등등의 이유로. 나는 그저 '탐닉'하고 싶을 뿐이고 나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고 싶을 뿐이다. 사회과학의 두 번째 메리트가 바로 이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 알아갈 수 있다는 것. 나는 사회적 존재이므로, 사회에 대해서 알아야 비로소 나 자신에 대해서 알 수 있다. 나는 사람에게서 태어났고, 사회에 의해 길러졌으며 앞으로도 자연 속으로 숨어들어 도사가 되지 않는 이상 사회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내가 나에 대해서 궁금할 때, 나 자신을 '개인'적 존재로만 놓고 파고들면 반드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그 때 나는 주변과의 '관계'를 생각해보게 된다. 그래서 사회과학적 시점은 내게 도움이 된다. 사회과학의 세 번째 메리트는, 나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 믿게끔 강요받았던 것들에 대해 의심하고, 그것이 진실이면 진실임을 알고 거짓이라면 거짓임을 알게 되는 과정을 통해 나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점점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 자유로 인한 쾌감은 분명 크다. 하지만 솔직히 배우면 배울 수록, 내가 이 정도까지 자유로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내가 영화 매트릭스 속 주인공이라면 나는 많이 갈등할 것 같다. 어떤 색 약을 먹어야 할 지. 그냥 계속 살던 세계에서 살 것인지, 아니면 환상에서 깨어나 매트릭스 세계로 넘어갈 것인지. 내게 있어 중요한 건 무언가를 제대로 아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나는 그저 '행복'하고 싶다. 내가 행복할 수 있다면 몰라도 되고, 알아도 행복할 수 없다면 알고 싶지 않다. 지적 욕구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충분조건이 아니다. 분명 지적인 면이 나를 점점 자유롭게 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자유'를 위한 '자유'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위한 자유를 원한다. 행복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할 것이지만, 내가 충분히 행복해서 더 이상 자유롭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더 이상 자유롭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왜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있는가, 아니, 내가 지금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있는 건가, 앞으로도 계속 공부하기를 시도할 것인가.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귀찮은 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계속 책에 코를 박고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학교'라는 공간에서 '어떤 것'을 공부하면서 살 것인가. 그렇다. 나는 공부가 좋아서 공부를 했던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책 속의 세계로, 상상 속의 세계로, 이상적 세계로 도피했던 것이었다. 이게 내 삶의 전부는 아닐 거다, 이것말고 더 나은 세상이 분명 있을 거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에게서 마음을 닫고 정갈한 텍스트와 관념의 세계에 파묻혀 지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내 삶의 무게는 텍스트에 조금 더 치우쳐 있다. 최선을 다해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오랫동안 이어져왔던 삶의 방식이라 쉽게 바로잡히지는 않는다. 그 균형을 잡으려 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고민이 시작되는 것 같다. 나는 학교를 다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공부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이렇게 공부하는 것뿐일까. 행복해지는 방법이 이 길 뿐일까. 내가 만약 공부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없을까, 하는 그런 생각. 가능성은 여러 가지로 열려 있다는 것을 안다. 사실 학교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고, 학교에 다니더라도 학교 공부에 매달리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나도 조금씩 풀어나가야겠다. 학교 공부는 충실히 따라가야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나 자신의 삶의 틀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도록. 선 공부, 후 적용의 공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선 경험, 후 공부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경험에 의해 무언가를 느끼고, 궁금해 하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공부. 이렇게 공부해두면 언젠가는 써먹을 데가 있겠지,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공부가 아니라, 분명한 동기에 의해 시작되는 공부를 하고 싶다. 만약 공부를 할 것이라면. 지금 내가 공부하고 싶은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리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다. 나를 행복할 수 없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대해 탐구하고, 알아내서 비로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어느 한 지식 가지고는 되지 않는 일들이다. 나 자신이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지 알아야 하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아야 하고, 내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야 한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행복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려면 더더욱 타인과 세상에 대해 알아야 한다. 내 마음의 평화, 그리고 이 평화로부터 얻은 에너지로 타인까지 행복하게 만들고, 그 일로 인해 다시 한 번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선순환. 그렇게 된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행복하게 산다면 인생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고, 나는 순식간에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죽게 되는 그 날, 나 자신에게 묻고 싶다. '이 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이 질문에, '다시 살아도 이 생처럼' 이라는 대답을 내놓을 수 있게 살고 싶다. 후회도 미련도 없이 깔끔하게 안녕, 하고 눈 감을 수 있도록. 일단은 오늘 하루에 최선을 다하면서 계속 생각을 해봐야겠다. 친구랑 점심을 먹고 수업을 들어가서 열심히 듣고, 친구랑 얘기도 하고, 저녁을 먹고 동아리 모임에 가야지. 아르바이트로 확정이 됐다. 주중 스케쥴이 잡혔으니 주말 아르바이도 구해야지. 아, 덧붙여 내가 우리 학교의 수업을 듣는 게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재미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용적으로는 그저 그렇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진리나, 증명방식이나, 그의 이론은 아 뭐 데카르트가 이렇게 생각했구나, 하는 정도.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이런 맥락에서 한 거구나. 그래도 참 대단한 사람이기는 하다. 세상을 보는 관점을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이라니. 인식의 틀 자체를 깰 수 있는 사람이라니. 이런 사람이야 말로 알을 깨고 나온 새가 아닌가. 하지만 더욱 재밌는 건 이 과정에서 교수가 던지는 끊임없는 질문들에 생각하고 답하고, 또 다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과정이다. 데카르트라는 사람과 그의 이론을 소재를 공부하고, 우리는 생각하고 질문한다. 그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그는 말한다.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지금껏 알고 있던 모든 것들에 의심을 가할 것이라고. 그가 살던 시대는 종교적인 세계관, 그러니까 세상은 누군가가 창조한 것이며 우리는 그 피조물이라는 세계관이 지배적이었다. 종교의 힘이 강했기에, 그에 반대되는 주장을 하면 그는 배척받기 일쑤였다. 실제로 데카르트는 갈릴레오가 지구가 돈다는 것을 주장하다가 파문당하는 것을 보고, 그 자신의 책에서는 교회를 비롯한 기존 학자들과 척을 지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세상이라는 곳은 '기계'적인 것이라는 사고를 전개한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는 노예적인 사고에서 탈피해서,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인식하고, 그것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명확히 알고, 세상과 자연에 관한 진리를 깨달아 마침내 자유롭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생각'이다. 베이컨은 우리의 생각에 여러가지 우상이 있어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경험을 더욱 중시하는 반면, 데카르트는 우리의 감각은 우리를 속이는 경우가 많고, 경험만으로는 진리를 얻을 수 없기에 이성적으로 '추리'를 해야만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진리를 추구하는 그 어떤 것은 바로 나라는 존재이며,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기에,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육체와 정신,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은 별개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또한 뭐라뭐라 하면서 신이 있다고 확신하는데, 솔직히 나는 데카르트가 갑자기 신이라는 존재를 끄집어 내는 게 뜬금없다고 생각하고, 당시의 종교계에와 부딪치지 않기 위해 신의 존재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자신이 정말 신이 우리에게 영혼이나 정신 같은 무엇을 집어넣어 주었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아무튼 데카르트는 우리는 생각하기에 존재하고, 존재하기에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의 입장에서, 물질세계에 대해 탐구하고 증명하고 설명한다. 그는 철학자이자 과학자이다. 그의 책에는 우주, 태양, 지구, 항성, 혜성 등의 성질, 빛의 성질, 그리고 우리 몸에 대한 해부학적인 설명들이, 오늘 날의 지식과 비교해 크게 틀린 바가 없을 정도로 정확히 설명되어 있다. 또한 그는 수학자이기도 했다. 좌표평면을 생각해냈다는 것은 아주 유명한 일화인데, 잠시 잊고 지내다가 겨우 떠올리곤, 아 맞다 그게 데카르트였지, 하고 놀랐다. 사실 수학자라면 수학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어서 사상가로서의 데카르트와 수학을 연결짓지 못했었다. 어쨌든 데카르트는 유클린트 기하학이 발견한 공간의 기본적 3요소, 점, 선, 면으로 수학적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이 물질 세상에도 고정불변하고, 다른 모든 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인 진리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진리란 무엇일까, 왜 진리를 찾아야 할까. 거기에 대해 과학은 대답한다. '자유롭기 위해' 그리고 '더 잘 살기 위해.'라고. 그러면 진리란 과연 있는 걸까. 이 물질 세계에 변하지 않는 것이 과연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통해서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이성? 경험? 아니면 계시? 이러한 종류들의 생각은 재미있기는 하다. 알면 알수록 세상이 만만해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나를 묶어놓있던 것들이 조금씩 풀어지는, 사고가 트이는 자유로운 느낌.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 는 말은 이런 의미가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인간이 자연을 완전하게 파악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건지, 그래서 인간이 지금 자연을 지배하고 있긴 한 건지, 그것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줄 지는 분명 확실치 않다. 세상에 진리가 있는 지 없는 지도 모른다. 내 개인적인 입장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세상에 대해서 전부 알 수는 없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이상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알았다고 판단할 근거가 없다. 얼만큼 알아야 다 아는 것인가? 모르는 것이 없을 때? 궁금한 것이 없을 때? 우리가 '아 다 알았다'라고 하는 그 시점에도, 여전히 어딘가에는 다른 세상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있는 지 없는 지 우리가 모른다면 그것이 없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세상에 대해 다 알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만 세상을 알면 되는데, 그 필요한 만큼이 또 얼만큼인가 하는 것도 꽤나 복잡한 문제이다. 우리는 항상 더 행복하고 싶어한다. 지금 세상은 과거에 비해 물질적로는 매우 풍요로워졌지만, 여전히 과제를 많이 안고 있다. 우리는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과연 앞으로 아무것도 더 알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올까? 그런 세상이 온다면 인간은 그 때서야, 자신의 존재를 잊고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행복해지기 위해 '나'를 알아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를 알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한 걸 수도 있다는 것이다. 행, 불행은 어차피 가치 판단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행불행에 대해 모른다면 우리는 행복할 것도, 불행할 것도 없다. 그저 살 뿐인데, 그렇게 그저 사는 것이 과연 불행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보기에 개의 삶은 그저 그렇다. 그래서 인간이 우월하다는 의식에 빠지곤 하는데, 과연 이게 우월한 건지 불행한 건지 모르겠다. 물론 인간의 성과에 대해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금은 의심해봤으면 좋겠다. 자연으로부터 끊임없이 자유로워지고 자연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 더욱 행복해지는 길인지. 학문의 최종 목표는 '자연으로의 귀의'라고 했다. 학문의 목표는 그러한데, 정작 사람들의 목표는 그러하지 않다. 날이 갈수록 더 인간다워지고만 있다.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자연이 우리와는 별개의 무엇, 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인간은 자연이 아니고, 그저 인간일 뿐이다, 라고.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언젠가 잊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무섭다. . . 오랜만에 집중해서 수업을 들었더니 이런 저런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머리가 조금 복잡하기는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에 사로잡히지 않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이 여유.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이 사고를 즐겨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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