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trois.
  hit : 2285 , 2013-09-07 23:58 (토)

필리핀에 다녀오고 나서
이제는 좀 쉬겠다는 이유로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고
별다른 일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그렇게 시간을 보내왔다.

지난 학기를 정신 없이 보냈다며
이번 학기는 휴학을 하기로 결심했다.
천천히 하고 싶은 일들도 하고 싶었고,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족들도 없고 집도 없는 서울이 아니라
우리 집에서 가족들하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에서였다.

단순하고, 느리게.


그렇게 집에 있다보니 
하루 종일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하기 일쑤였다.

물론 친구들을 만나러 가기는 했지만 
약속이 있는 날에만 집에서 나갔을 뿐 
약속이 없는 날에는
집에만 있었다.



나는 내가 지쳤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 자꾸 집에만 있으려 할까
왜 책만 읽으려고 할까,
또 으레 버릇대로 그 메커니즘을 분석하려 들었다.

책을 자꾸만 읽는 것은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 속에 갇히는 것이 기분이 좋아서,
라는 둥,
청소를 하지 않으려는 것은 
어지러진 무질서 상태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둥, 

새로운 일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서라는 둥, 
아니면 '성폭행'이라는 화두에 갇혀 있어서라는 둥.

별의 별 이유를 다 갖다 붙이면서
지금껏 쉬고 있는 이유에 대해 짐짓 심각하게 고민을 해댔다.



그러다가 오늘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개뿔 
그냥 게으른 거야.




라고. 
무슨 새로운 일을 하기 싫은 게
인생무상, 때문인 게 아니라
그냥 귀찮아서다.

청소를 하기 싫은 건 
무질서가 좋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귀찮아서다.

운동이 하기 싫은 건
무슨 두려움 때문이라든지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귀찮아서다.

고소를 하기 싫은 것도
무슨 사회적인 시선, 상처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귀찮아서다.





그냥 지금 내가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힘들게 살아왔으니
이제 좀 쉬어도 되지 않겠느냐는 이유로 합리화 하면서
한껏 늦장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게을러지기 시작하면
'무의미'를 생각하는 버릇이 도지기 시작한다.
일상이 바쁠 땐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특별한 일상이 없을 때는 
으레 
'귀찮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사는 건 의미 없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것이 실체 있는 진지한 고민인 줄 알았다.
그 어떤 공허, 
라든지 무상감, 
같은 거창한 것들. 



그것이 진지한 고민이라면 
내가 바삐 지낼 때에도 문득 문득 고개를 들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신나고 바쁘게 살 때는
전혀 고개를 들지 않는 그런 생각들이
꼭 내가 아무런 일 없이 지내고 있을 때만
나에게 끈적 끈적 들러붙는다.






그 이름은
'게으름'
혹은
'귀찮음'






겉멋 부리지 말자.
느리게 살기?
단순하게 살기? 

느리고 단순하게 사는 것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해야 할 것은 해야 하는 것이다.




.
.



한 평생 대충 뭉게다가 가면 된다는 생각,
어차피 오래 살아야 이제 50년 밖에 안 남았다는 생각.
눈 감았다 뜨면 죽을 것이라는 생각,

귀찮을 때 
드는 생각.

한심하구나.



물론 뭔가 이루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악착같지 않음을 거창하게  포장하지는 말자.
여러 이유 없다.
귀찮은 것이다.



귀찮아서
'안' 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겉멋 부리지 말기.
느리게 산다느니 단순하게 산다느니
머리를 비운다느니, 
그런 말들로
나 자신까지 속이지는 말자.
나 자신을 속이면 
답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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