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trois.
  hit : 2705 , 2013-09-11 14:13 (수)



요즘 곁에 두고 있는 책들이다.
한 권짜리 소설인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다 읽고 난 후 소화를 시키고 있는 중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 소설.
첫 장을 읽자마자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두고두고 읽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하나 사서 갖게 되었다.

이사를 하면서
한 번 읽고 끝냈던,
다시 읽을 필요가 없는 책들을 
모두 처분했다.

버리거나, 
누구를 주기로 하거나.

할머니는 새책을 왜 버리냐고 하셨지만
나는 그 자체로 내가 아닌 책들을 갖고 있는 것이 싫다.
책을 읽을 줄 몰랐을 때
실수로 샀던 책들이다.

물론 다시 내다 팔거나 
누구를 줄 수도 있겠지만
그럴 정도로 많지도 않았다.
두 세권 정도.

그리고 남들에게 권할 만한 책도 아니었다.



.
.



지금 내 책꽂이에 남은 책은
아주 특별한 용기
상실의 시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스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사람 풍경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과 빌려온 「아리랑」




전공 서적들, 
그리고 성경과 사전.



그렇게 정리해놓고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갖고 있는 동안 
두고두고 펴볼 책들이다.
언제 펴서 어느 부분을 다시 읽어도
새롭게 읽히는 책들.




요즘 읽고 있는 책은
「아리랑」이다.
12권의 장편 소설인데,
한강과 태백산맥으로 이어지는 조정래의 역사 대하소설이다.
물론 이 정도는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소설이기도 하다.


언젠가 한 번 읽어보고 싶었는데
양이 양인지라 쉽사리 손을 못 대고 있었던 것이다.
휴학을 한 김에 손에 잡았는데
무겁게 읽힐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아예 푹 빠져버려서 탐독하고 있다.

하루에 한 권 꼴로 독파해 나가서
지금은 8권에 이르렀다.
여러 인물들의 기구한 삶의 이야기들이 얽히고 섥혀
일제 강점 당시 우리 나라의 상황을 아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아마 이 소설도 여러 번 읽힐 듯 하다.
지금은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한 인물, 한 인물의 삶을
들여다보는 데 초점을 맞추며 읽고 있다.




이렇게 읽으니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식민지에 대해 달달 외울때보다
훨씬 더 쉽고 깊게 와닿는다.

얼핏,
이게 소설의 의의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렸을 때는
마냥 글 쓰는 게 좋아 단편소설을 여럿 쓰곤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글 쓰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회의를 느끼게 된 후로는
소설을 쓰지 않게 되었다.

그 후로도
도대체 소설이란 무엇일까
왜 쓰는 것이고 왜 읽히는 것일까,
늘 고민이었다.

그런데 아리랑을 읽으면서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조정래는
역사 의식을 줄글로 풀어내기보다는
그 당시의 사람들의 삶을 통해
전하려는 것이었고
그것이 객관적 사실보다도 피부에 와닿는 것을 나는 느꼈다.



문득,
나의 이야기도 이렇게 소설로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기도 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이렇게 긴 제목이 이렇게 딱 떨어질 수가 있을까,
내심 신기했던 점이다.
무엇이든 길면 한 쪽 끝만 잡고 있는 것처럼 반대쪽 끝이 처져내리기 마련인데
이 제목은 마치 양쪽에서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팽팽하게 그 힘이 끝까지 들어가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 그런 지는 모르겠지만.



다자키 쓰쿠루라는 남자가
16년 전에 있었던 일, 그리고 그로 인한 상처를
애써 묻어가며 살고 있던 그 남자가,
사라라는 여자에 의해 
그 일을 들춰내는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다.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어.'

'역사는 지울 수도 다시 만들어낼 수도 없는 거야. 그건 당신이라는 존재를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사라가 쓰쿠루에게 하는 말이다.
그런 것일까.
나는 역사를 지우려 하고 있는 것일까.





아리랑에서 
독립운동에 나선 한 남자가 이렇게 말한다.

'결과가 어찌되든 옳은 일은 하는 것이 맞다.'고.
자신이 목숨을 바쳐 조선이 독립이 되든 되지 않든
어쨌든 옳은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자신이 목숨을 잃거나
가족들이 화를 입을 수도 있고
그런 희생을 했는데도 조선은 독립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런 것일까.
그 결과로 나는 안락한 거처를 잃을 수도 있고
가족들과 틈이 벌어질 수도 있고
마음 속에 더 깊은 상처를 입을 수도 있겠지만
해야 하기에,
옳은 일이기에
해야 하는 것일까? 

이렇게
당장의 안락에 내 몸을 내맡기고
내 목소리를 무시하는 것은
친일을 했던 작자들과 다름 없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결과가 두려워
옳은 일을 기피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내 안의 나는
그렇게도 나를 두드려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정신 차리라고.




.
.

생각해보면
지금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그 13년 동안을 살았다.

당장의 삶이 중요했다.
집에 들어가면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기는 했지만
집에 들어가지 않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렇게 되면 갈 곳도 없었고
당장 내일 학교에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잡혀 들어간다면 
더 심한 화를 당했으면 당했지
조용히 넘어갈 리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만 빼면 
당장에 나쁠 것은 없었다.
집도 있었고 차도 있었고
밥도 먹을 수 있었고 
내 방도 있었다.

용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닐 수도 있었고
친구들이랑 놀러도 갈 수 있었다.
학교에서 공부도 잘 했고
친구들도 많았으며
인기도 많았다.

신세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엄마도 있었고 동생도 있었다.
싫지만 아빠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 가족은
멀쩡했다.

그 멀쩡한 가족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 모든 것들에 비해
내가 겪고 있는 일의 무게가 
그리 무겁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길면 한 삼십분 정도
그냥 내 몸을 그 사람에게 내맡긴 채
나는 다른 곳에 있다가
일이 끝나면
다시 내 몸으로 돌아오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나는 네 식구가 있는 집에서
공부 잘하는 우등생 딸
성격 좋고 인기 많은 친구로 
살 수 있었다.





만약 내가 기를 쓰고 도망을 갔더라면 
그 일은 금방 끝났을 것이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엄마에게 말하거나 
다른 가족들한테라도 말했더라면 
그 일이 13년 동안이나 계속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나에게 칼을 들이댄 적도 없었고
병원에 갈 정도로 때린 적도 없었다.

때린 적이 많긴 많았지만
손과 발로 때렸을 뿐
흉기나 무기 같은 것으로 때린 적도 없었고
피가 난 적도 거의 없었다.

물론 아프기는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 그리 무서웠던 것일까.
칼 한 번 휘두르지 않는 그가.
내가 악을 쓰고 덤빈 적이 있던가?
한 번이라도 그 자를 물어본 적이라도 있는가? 
뭐라도 그에게 집어던져 본 일이 있느냔 말이다.


그저 이를 앙다물고
빌지 않는 것이 내가 한 최선의 반항이었다.
그 마저도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엄마는 영문도 모르고 내 옆에서
'잘못했다고 해, 어서!'라고 소리를 칠 뿐이었다.




.
.


만약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 곳을 빠져 나올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를 윽박지르고 강압적으로 다루면서도
이 일이 알려질까 두려워
엄마에게는 내 알몸 사진을 담보로 협박을 하고
나에게는 말하면 네 신세 망치는 거라고 협박을 했던
그런 비열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이 일을 가족들에게 이야기하면
그가 집에 불이라도 지를까 무서워했다.
도대체 어디서 기인한 공포였을까.

그는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라는 한 사람에게
나,
엄마,
그리고 내 동생까지
세 사람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어째서 당할 수밖에 없었을까.
우리 모두가 그가 강하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기어오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반격은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너무나 큰 존재였기에.

그러나 그것은 모두 허황된 것이었다.
그는 강하지 않았다.
강해 보이려고 애를 썼고
우리는 그 환상에 모두 속았던 것이었다.

그는 비열했을 뿐이다.




.
.


그런데도 나는 아직까지 그 허황에 짓눌려있다.
그 때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사람만 원망하며
모든 것이 그 사람 때문이라고
그래서 나는 이럴 수밖에 없다고
주저앉아 울기만 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겠냐며.



그러나
나는 해본 적도 없다.
당장의 생채기를 치료하기는 했어도
진짜로 그 일을 매듭지으려고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늘 
그 일을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다, 할 수가 없다,
고 제자리 걸음만 했을 뿐이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가면서.
하지만 결국은



게으른 것 뿐이다.




정말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제는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누구 때문이라고 탓하고 주저앉아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
물론 돌을 던진 사람이 죄를 지은 것이지만


'왜 자꾸 돌을 던져요!'
라고 울부짖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질 않기 때문이다


왜 돌을 던졌느냐고 따지고
돌에 맞지 않도록 피하고
돌을 던지지 말라고 요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돌을 막아달라고 그 사람을 말려달라고 도움을 청하고
그래도 안 되면 나 역시 돌을 집어던지는 것,


그렇게 해서 내 한 몸을 지키는 것이
나에 대한 나의 책임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 책임을 유기한 채
주저 앉아 날아오는 돌을 맞으며


도대체 이 돌의 정체는 무엇일까
돌을 던지는 저 사람은 누구일까
왜 돌을 던지는 것일까
돌을 던지는 행위의 의미는 무엇일까
왜 주변 사람들은 저 돌을 막아주지도 못하고
던지지 말라고 말려주지도 못할까
왜 나는 돌을 맞고 있는 것일까
왜 돌을 던지지 못하는 것일까

고민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은 계속 날아오고 있는데.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돌을 맞고 있는데.

돌 맞는 일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돌을 맞으면서도 이제는 다른 일들을 해 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되도록
나는 그저 돌을 맞고만 있었던 것이다.

맞았던 자리에는 상처가 생겼다가
아물었다가 하면서 굳은 살이 박혔고 흉터가 생겼다.
그 자리에는 다시 돌을 맞아도 
새로 상처가 쉽게 생기지 않았다.

온 몸이 그렇게 되도록
나는 돌을 맞고만 있었다.
몸은 돌을 맞기에 최적화가 되어왔고,
지금은 돌을 맞아도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돌을 맞아야 하는 걸까?
내가 왜 돌을 맞아야 하지? 

던지지 말란 말야.
네가 뭔데 나한테 돌을 던져? 
왜 지금껏 나한테 돌을 던졌어? 

너도 맞아봐.
내가 맞기만 할 줄 알아? 




이런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도
잘 들지 않는 것은 
돌 맞는 것에 내성이 생긴 탓일 것이다.


그래도 깨어나야 한다.
내성이 생겼을 뿐
여전히 생채기는 생겨나고 있고
내가 맞아야 할 돌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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