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 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다가, 그 친구가 문득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몸 담고 있는 단체에 내 전 남자친구가 들어오고 싶어한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그래서 회의 시간에 그 이야기를 했다고.
그 친구는 내가 한창 그 사람 때문에 화가 나 있을 때 내가 고민 상담을 했던 친구였다.
전 여자친구와 정리가 덜 된 상태에서 나를 만났고, 2주만에 그 전 여자친구와 다시 만나서 나와 헤어졌다는 상황에 그 친구는 어이없어 했고, 그 남자를 많이 욕했었다.
그리고 앞으로 두고 보라고,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지만 만약에라도 자기랑 같은 곳에서 일하게 되거나 만나게 된다면 괴롭혀줄 거라고. 편하게 두지는 않을 거라고.
그 때는 그렇게 말하는 그 친구가 참 고마웠다. 제가 뭘 어쩌겠느냐만은, 그래도 그렇게 자기 일처럼 화를 내주고 내 편을 들어주는 게 고마웠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잊고 지금까지 지내왔다. 그런데 어제 그 친구가 전화를 서는,
그래서 내가 안 된다고 했어.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뭐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럴싸한 이유를 대면서 반대했지. 그래서 결국은 없던 일로 하기로 했어. 내가 뭐랬어? 가만 안 둔댔지?'
라고.
나는 아직까지도 그 일을 생각하고 있는 그 친구가, 정말로 했던 말을 지킨 친구가 참 고마웠다.
사실 그런 일로 한 사람을 단체에 들이고 말고 하는 게 어찌 보면 좀 유치할 수도 있고 옳지 않은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 친구의 마음이었다. 정말로, 완전히 내 편이었던 것이다.
나조차도 그 남자에게 화 한 번 내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그저 잊고 살려고만 했었는데, 아직까지도 그 일을 생각하고 소위 '되갚아 주었다'고 나에게 자랑을 하는 것이었다.
그게 너무 귀엽고 고마웠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자라나면서 누구 하나 속시원하게라도 아버지를 욕해주거나 내 이야기를 듣고 화를 내주거나 그에게 이런 사소한 앙갚음이라도 해주었다면 아니 그런 말이라도 해주었다면
나 역시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었을 텐데.
. .
그 친구가 그렇게 해주니까 아, 그게 그럴 만한 일이었구나 그게 이렇게 어떤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만큼의 잘못이구나, 하는 것이 이해가 갔다.
만약 그 친구처럼 엄마나 누군가가 나와 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미워해주고 그가 잘못했다고 이야기해주었다면
나는 그런 죄책감과 수치심에 시달리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 자신의 가치를 그렇게 깎아내리지 않아도 됐을 지도 모른다.
아무도 내 편이 아닌 상황에서 나 혼자만 나 자신의 가치를 고수하는 것은 확신도 서지 않을 뿐더러 외롭고 계면쩍은 일이었으니까.
아직도 나는 내가 그에게 화를 내도 된다는 확신은 들지 않는다. 마치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그래도 된다'고 머리에는 입력이 되어 있지만 아직 가슴에는 입력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 .
이 친구에게 내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모두 한 마음으로 나 대신 그를 욕해준다면 그리고 내 편을 들어준다면
내 마음은 위로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내 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계속해서 내 편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진정한 내 편이 아니다.
. .
자기 자신을 향한 메세지는 최초의 타인이 나에게 보냈던 메세지를 바탕으로 형성된다고 한다.
자의식은 타인의 평가를 내면화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내가 내면화한 가치는 나를 위한 가치가 아니었다.
'너도 좋아했잖아' '다 너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이까짓 몸뚱아리가 뭐가 그렇게 중요해'
등등. 모두 나를 위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나를 위한 메세지가 필요하다. 진정으로 나를 위한 말들. 나를 위한 가치들. 가해자를 위한 가치가 아니라.
내면화를 다시 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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