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TSD에서 벗어나는 법   치유일지
  hit : 3149 , 2014-03-12 21:45 (수)


이번에는
'내 인생을 힘들게 하는 트라우마
_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서 벗어나는 법'
이라는 책을 읽었다.

친구랑 같이 서점에 책구경을 갔다가 
우연히 눈에 띄어서 산 책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한 치료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나한테 꽤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나는 PTSD까지는 아니다.
물론 정신병원에서 검사를 받았을 때
'suggestive of PTSD'라는 진단결과가 나오기는 했다.
PTSD의 징후가 있다고.
그래서 이 책에 더 관심이 갔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을 치료하려는 사람에게도 필요하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도 좋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했다.
나 역시 동의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가 심각한 증상을 불러오지 않았을 뿐
나 역시도 외상 후 스트레스를 겪고 있기 때문에.



.
.



특히 도움이 되었던 부분은
우리의 신체가 외상을 회상하는 원리에 대한 설명이었다.

상태 의존적 회상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외상과 관련된 상황이 마련되면 그 외상이 떠오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수시로 성폭행과 관련된 생각이 떠올랐고,
그 생각만 하면 기분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저,
내가 오랫동안 성폭행을 당했기 때문에
수시로 이 생각이 떠오를 수밖에 없나보다,
무시로 떠오르는가보다,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찾아오면 여지없이 휘말렸다.

그런데 상태 의존적 회상은,
외상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면 
그 외상을 회상하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중요한 점은,
이 때의 '상황'이란

외상과 직접적으로 관련되거나
외상과 현저하게 비슷한 상황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즉, 나의 외상이 성폭행이라고 해서
꼭 섹스라는 상황이 외상을 회상하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외상 당시와 
비슷한 자세,
비슷한 감각과 감정만으로도 외상을 떠올리게 된다고 했다.
즉, 



누워 있는 것,
앉아 있는 것,
다리를 벌리고 있는 것,
과 같이 일상적으로 아무렇게나, 수시로 하는 이러한 사소한 행동만으로도
외상을 떠올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알고 나니까,
내가 성폭행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때,
어째서 이 생각이 났는지에 대해서 추론해볼 수 있었고,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내가 자위를 하거나 야동을 볼 때는
성폭행을 당했을 때와 같은 느낌이 들고
비슷한 장면들을 보기 때문에 외상이 회상된다.

내가 긴장했을 때는,
당시에 내가 도망치기 위해 긴장하고 있었던 느낌이 떠올라
외상이 기억된다.

내가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다리를 벌리고 있을 때에도
나는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게 된다.

어둠도 마찬가지.
중년의 아저씨를 보거나,
아빠와 손을 잡고 가는 아이를 볼 때도.





(이렇게 생각하면 어이가 없고 황당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다.
제기랄, 일상에서 뭘하든 그걸 연상할 수 밖에 없다는 거잖아, 하는 생각에.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시시때때로 그 생각에 시달렸던 건
어쩔 수 없었다는 점도 동시에 알겠다.)


그리고 이렇게 내 행동뿐만 아니라
감각 역시도 외상을 떠올릴 수 있게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암묵기억, 즉 무의식에 기록되어 있는 감각들을
외현기억(실제 상황에 대한 기억)과 연결시켜야만 한다고 한다.

몸은 모두 다 기억하고 있다고 하니까.
그렇게 해서 외상 사건을 현재와 분리시켜야 한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과거와의 경계를 명확히 해서,
현재에 있을 수 있어야 하며
과거의 일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한 번 힘써봐야겠다.
일단은 과거를 기억하고 파악해보고 싶다.
명확하게.

머리 속을 스쳐지나가는 혼돈스런 장면으로서가 아니라
각각의 일들을 독립적으로.
그 때 어떤 일이 있었고
내가 무엇을 느꼈으며
그 일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렇게 해서 하나씩 정리해나가고 싶다.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로.



물론 무지 오래 걸릴 것이다.
무지 많으니까.
수 천번은 해야 될 것 같은데,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야겠다.
상담사 선생님이랑 같이 하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이제 외상을 끌어올릴 만한 준비가 어느 정도 된 것 같다.
그동안은 살아갈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자원들을 쌓아왔던 것이라 생각한다.

나에 대해서 공부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리고 그 일과 관련해서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내게 남은 것들에 대해서 다룰 때라는 생각이 든다.





.
.



일단 현재에 온전히 있는 연습을 많이 해야겠다.
불교 및 명상서적으로 이 연습에 많이 도움을 받았다.
확실히 전보다 더 지금에 있을 수 있게 됐다.

전에는 어디를 돌아다녀도
지난 후에는 별로 기억이 안 났다.
주변 세계를 잘 보지 못하고
늘 생각만 하염없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산책을 다녀오면
풍경들을 또렷이 볼 수 있고
날씨나 냄새, 감각들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기억나는 것도 훨씬 많다.

말로는 다 설명하기가 좀 힘들만큼,
많이 변했다.
진짜 시간이 흘러가는 느낌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여행할 때나 명절 때나
잠깐잠깐씩 느꼈던
그런 생생함 같은 것들이 일상 속에 들어왔다.







.
.



일단 현재와 과거를 분리하기,
라는 방법을 실천하기 위하여
현재를 파악해보아야겠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들은 대개 현실을 식별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이들은 내적감각을 과거의 사건과 연결시키고, 여기서 얻은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현실을 평가한다. 따라서 외부세계에 대한 인식은 내적 자극에 비해 
그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내 인생을 힘들게하는 트라우마>, 바빗 로스차일드, 김좌준 옮김, 소울메이트, 2013, 262p l 21~263p l3





내가 너무 과거의 일들에 대한 시각을 갖고
현재의 나를 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생각보다 괜찮을 수도 있는데
뭔가 내가 굉장히 망가졌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부족하고, 비틀거리고, 비관적이고 
뭔가 아무튼 딱 친족성폭력 피해자에 걸맞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현재의 시각으로 현재의 나를 한 번 관찰해봐야겠다.
나 혼자의 시각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해봐야지.







.
.



일단 지난 일주일 간의 나의 일상을 기록해 본다.



3월 12일 수요일

오전 8:00 기상, 일어나자마자 친구네 집 식구들과 즐겁게 아침 식사를 함.
밥 먹고 다시 좀 누워 있다가,
내일 있을 공연 내용을 짜고,
책도 좀 읽고, 

오후 12시가 넘어서 운동을 하러 나감. 30~40분 정도 걷다가 들어옴.
들어왔을 때는 친구네 부모님들이 들어와계셨고, 
나는 오므라이스를 해먹음.

또 책을 읽다가,
낮잠을 좀 자고,
언니가 들어오셔서 다시 식구들이 모여 앉아 저녁을 먹음.
떡볶이도 먹고
토종닭 삶은 것도 같이 먹음.

밥 먹다가 친구가 집에 들어와서 좀 떠듦.
책을 마저 읽고, 
지금은 일기를 쓰고 있음.


3월 11일 화요일

오전 9:30 기상
오전 10시 쯤 운동을 하러 나감. 30분 가량 등산을 하고 돌아옴.
씻고 친구와 고기부페를 감.
신나고 맛있게 고기 부페를 먹고 카페 베네에 가서
초코악마빙수를 먹음.
지금까지 먹어본 빙수 중 가장 맛있다고 극찬.

터질 것 같은 배를 안고
공원에서 산책을 함.
최근 남자친구와 헤어진 친구의 고민을 들어줌.
그 공원에서 처음 만났다길래,
역사적 현장을 탐방한다며 놀려줌.

친구는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가고
나는 집에 돌아옴.
이미 배가 터질 것 같지만
자꾸 소고기를 먹으라고 하셔서 또 고기를 맛있게 먹음.



3월 10일 월요일

기상시간 기억 안남.
역시 운동을 했는데, 몇 시에 나갔는지는 기억이 안 남.
등산을 했음. 

씻고 학교에 감.
동아리 모임이 있었음. 
잠시 회의를 하고, 같이 악기를 치며 목요일 공연 연습을 한 뒤
개강파티 장소로 이동.
가서 닭갈비도 먹고 밥도 비벼먹고,
신나게 떠듦.
2차로 호프집에 들어가서 또 감자튀김과 탕수육을 먹음.
신나게 웃고 떠들다가
집이 먼 관계로 10시 반에 몇몇 친구들과 함께 먼저 자리를 뜲.
12시 30분 가량 집에 도착.
씻고 바로 잠.


3월 9일 일요일

아침 9:30 기상
씻고 교회에 감.
2시까지 예배를 드림.
지금 머물고 있는 집의 부모님 두분이 모두 목사님이시라서 
교회에 열심히 다니게 됨.
물론 아직 믿진 못함.
하지만 기도를 하면 기분이 좋긴 함.
그래서 앞으로는 믿든 안 믿든 기도할 때만큼은 솔직하기로 함.

예배를 끝내고 친구랑 이것저것 사러 돌아다님.
미친듯이 바람이 불어서 둘이서 비명을 질러댐.
나는 모자가 없고 친구는 모자가 있어서 무지 부러웠음.
친구는 심지어 등산용 패딩이어서 
입까지 가려지는 모자가 달려있었음.

그리고 탐탐에 가서 초콜릿케잌 두 개를 시켜먹음.
얘기도 좀 하고, 
영어 스터디 계획도 짜고
책도 읽고
사진도 찍어대다가
집에 들어옴.

집에 들어왔더니 또 뭘 드시고 계셔서 뭘 먹음.




요즘 기분은 아주 좋음.
회의 자료를 올려야해서 없앴던 페이스북을 다시 살렸지만
예전처럼 페이스북을 많이 하지도 않고, 글도 올리지 않음.
틈날 때마다 애니팡2를 하고 있는데,
60단계를 깨지 못하고 있음.
이번 단계만 깨면 열쇠가 필요하게 되는데,
다행히 출석을 꾸준히 해서 15개의 루비를 모아놨기 때문에
바로 문을 열 수 있음:)

원래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
머리도 아프고, 뭔가 축 쳐지는데
근래들어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일어나서 바로 아침먹고, 사과도 먹고
하루 전반부에 운동을 했더니
하루 종일 기분도 좋고, 
축 쳐지지 않음.

생각도 많이 줄어듦.
연애 세포도 뭔가 다시 깨어남.

허리 둘레를 줄이기로 했음.
내 몸 다이어트 설명서라는 책을 읽어보니까
허리 둘레가 건강과 가장 관련이 깊다고 함.
건강하려면 여성의 경우 80cm 이하의 허리 둘레를 유지하는 게 좋다고 함.

나는 팔다리에는 살이 없는데
허리 둘레가 상당함.
80cm 이하로 줄여야겠음.

몸무게는 사실 별로 동기부여가 안 됨.
난 그다지 몸무게가 많이 나가지도 않고 정상체중이기 때문.

근데 배를 간과했음.
이렇게 허리둘레가 클 줄이야.





내일은 새내기들에게 동아리를 홍보하기 위한 공연을 함.
사실 좀 떨림.
하지만 그냥 '난 잘한다, 진짜 잘한다'라고 자기 암시를 하고 해보기로 함.

동생에게 용돈을 부쳐주기로 함.
엄마가 주긴 줬는데 새학기라 돈이 많이 든다고 함.
개강 첫 달이 중요한데,
돈 없어서 심란하거나 자신감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돈을 부쳐줘야겠음.
사실 옷도 사줬는데
더 두꺼운 옷을 사줄 걸 그랬음.
멀리 보고 봄 재킷이랑 가디건을 사줬는데
영하 9도라서 지금은 입을 옷이 없다고 함.
패딩 하나밖에 없다는데,
겨울 옷을 사줄 걸. 걱정 됨.


좀 더 신경을 써줘야겠음.
내일은 전화를 한 통 해야겠음.







.
.



성폭력,
재판,
고소,
심리 치료,
이런 거 아니어도 진짜 할 얘기 많다.
뭔가 뿌듯하기도 하고,

더 많이 해봐야겠다, 이런 식으로:)



p.s 암묵기억과 외현기억을 통합시켜 과거를 현재에서 분리하고 나면,
긍정적인 암묵기억을 늘리도록 해야겠다. 좋은 경험을 많이 쌓는 게 그 방법일 것 같다.
좋은 인연도 많이 만들고!
hs  14.03.16 이글의 답글달기

제가 보기에 현재의 하나씨는 그저 여느 20대 여대생과 다르지 않은 예쁜 사람인걸요 :)
아 물론 제가 하나씨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여느 대학생들보다 생각과 속이 깊고 똑똑해보인다는 인상을 받긴했어요. 일기를 읽으면서 하나씨가 깊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얻을 수 없는 값진 지혜를 얻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 하나씨의 면이 제게 훌륭하고 존경스럽고 대단하게 다가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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