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었어? 뭐가? 그 자리에 나온 아가씨. 너보다 한살 많고.. 조그만 회사에 경리라고 하더라. 어땠어? 뭐가 어때. 키는 158쯤 되려나.. 에- 뭐야. 너무 작잖아, 난쟁이 똥자루만하네! 당신은 그런 날 보며 웃는다. 나는 당신을 보면서 너무 작아, 158이 뭐야, 적어도 165는 되야지, 난 너무 큰 거고. 니가 얼마랬지? 나? 173. 크긴 한데 난 커서 좋은데. 계속 만날꺼야? 어머니한테 해놓은 말이 있어서.. 무슨 말. 두어번은 더 만나겠다고.. 한번 보고 어떻게 아냐고 하도 성화셔서. 그래, 그럼 두번만 더 만나. 주말엔 만나지말고. 푸핫, 왜? 평일에 일하고 만나야 볼 시간이 적지. 저녁늦게 만나서 커피만 마셔. 주말엔 왜 안돼? 주말에 만나면 밥도 먹어야되고, 밥먹으며 커피 마셔야되고, 영화도 봐야되고.. 데이트잖아! 그 아가씨 이번주말에도 다음주말에도 선약 있다고 하더라. 됐어- 그럼 맘 없다는 소리니까 만나지마. 뭐냐...
나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 당신이 이상해. 나만 이런가 싶어서. 담담하게 그 이야기를 묻고, 아무렇지 않게 웃는거 너무 힘든데, 당신은 너무 편안해보여서, 내가 이상한건지 정상인건지 모르겠어. 나두 솔직히 힘들다. 근데 당신두 알잖아, 우리 상황.. 어쩔 수 없다는 거. 알아, 당신 마음도 알고 상황도 알고. 또 당신이란 사람을 너무 잘 알아서. 또 그걸 다 이해해서. 그것때문에 내가 아무것도 못해서.. 나 혼자만 사는게 아니잖아.. 나는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이 없다. 나는, 항상 포기하고 살아서, 하라는대로 말 잘듣고 살아서.. 미안하다 용기 없어서..
아냐.. 사실은, 나 당신하고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많이 생각했어. 내가 과연 예쁨받을 수 있을까.. 당신 부모님께 당신은 귀한 자식인데, 어느 부모님이 나한테 그런 아들을.. 알아요. 다 알고.. 다 이해해.. 내가 더 모질게 할 수 있지만.. 그래야 쉽게 돌아설 거라고 생각하는데. 지금까지 당신 만나고, 고맙고, 사랑하는 당신한테 차마 그렇게까지 못하겠고. 천천히.. 마음 접자고, 우리 예상해왔던 거니까... 미안해.. 미안하다..
...
당신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고.. 늘 같이 있고 싶은데.. 미안해.
괜찮아, 우리 마지막까지 해피엔딩해요. 안 울게요..
오어사 가기로 했다. 지난달 밀양 만어사에 다녀오고 나서, 오어사도 가보자고 얘기했었다. 차를 타고 포항으로 달리면서 평소와 다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마지막 선물도 했다. 예쁜 빨간색 워킹화. 도망가라고 주는거야? 하는 당신에게 눈 한번 흘겨주고선 돈 내놔, 했더니 지갑에 있던 지폐 한장을 꺼내준다. 나한테 산거니까 도망가는거 아니다~ 알았지? 당신은 막 웃고선 신어보고 만져보고 예쁘다, 고맙다 말한다. 오어사 근처에 주차를 하고 절까지 가볍게 산책을 했다. 손도 잡고 팔짱도 껴보고, 어느 연인과 다름없이. 손목에 서로 하나씩 나눠 끼고 다녔던 염주팔찌.. 그 중 한 알이 깨져서 빠졌었다. 염주팔찌 새로 사줘? 아니, 다음에 다른데 가서 살래. 오어지, 저수지를 바라보고, 산길을 따라 본의 아니게 원효암까지 올라갔다. 약숫물 한잔마시고 아 좋다.. 우리 산 탄지 오래됐다, 그치 응, 등산가야되는데. 다음에 산타러 갈까? 눈치보며 묻는 내게, 그래, 그러자-하며 당신은 웃는다. 앞서가던 당신이 뒤돌아 손을 내밀었다. 암자의 돌담을 따라 걸으면서 당신은 앞을 보고 말한다. 당신하고 진작 만났으면, 우리 참 예쁘게 사랑했을텐데. 아무말없이 묵묵히 손을 잡고 따라걸었다. 집에 일있거나 행사있을때 데리고 가고, 우리 어머니하고도 잘 지내고.. 친구들 모임에도 데리고 가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캠핑도 하고, 산에도 가고 낚시도 가고.. 아무말도 하지 않고 걷다가 그런 당신 옆모습을 바라본다. 나는 싹싹해서 잘 했을꺼야, 그치? 어머님, 시장가요~ 김치 좀 주세요~ 반찬 좀 주시면 안되용? 하면서. 히히힛, 하고 웃으니, 당신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미안하다.. 괜찮아.
한시간 넘게 산책을 하고, 다시 차에 탔다. 지갑 속에서 적어온 것을 내밀었다. 이거, 우리 다 하려면, 적어도 4개월은 더 봐야되겠던데? 당신은 내가 건낸 종이를 펴보더니 박장대소를 한다. 뭐야, 이게 ㅋㅋㅋㅋ
우리 그동안 하기로 약속한거. 주왕산, 비슬산 등산. 겨울엔 소백산 눈산가기. 돌아오는 봄엔 기차타고 원동역에 꽃구경하기 또 뭐있지? 영화도 봐야되고, 트랜스포머 개봉하면 봐야되지, 낚시도 가야되고, 쏘가리도 잡아야되고 밀양에 얼음골 계곡트래킹도 해야되고. 암튼.
등떠밀려서 결혼하지마, 얼렁뚱땅.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냥저냥, 좋지도 싫지도 않고 나이는 찼고, 부모님은 장가가라 하시고, 그래서 그냥저냥 만나서 이정도면 괜찮네 어쩌네, 하다가 얼렁뚱땅 결혼하지말라고. 세상엔.. 정말 좋아죽어서 결혼한 사람들도 싸우고 이혼하고 헤어지는데... 나 나와서 살까? 뭐래는거야. 부모님하고 같이 사니까, 장가가라고 더 잔소리하시는 것 같아서. 형님도 있는데. 그래서 혼자 나와서 살겠다고? 집 구해서 따로 살면, 너도 심심하면 놀러오고, 밥도 해주고, 편하고. 자기 지금 나한테 희망고문하나? 마음이 그렇다고, 마음이. 그런 마음이면 결혼하지말라고.. 알았다, 하며 씨익웃곤 당신은 내 손을 잡는다.
나는 매일 헤어지는 중이다. 당신과 추억을, 내가 꿈꾼 당신과의 미래를. 매일 어딘가에 두고 묻으면서. 언젠가는 당신을 놔줘야 되리란 것을 알고 있었고, 내 곁을 떠날 것 이란 것도 알고 있었는데, 나는 지금 무엇이 두려운걸까.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영원을 꿈꾸며 사람들은 사랑을 한다.
처음에도 그랬듯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해 사랑할 뿐이다. 우리의 마지막까지. 사랑한다 말하고, 보고싶다 말하고 당신을 아낀다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 설령, 당신이 떠난다 하여도. 그것이 내 사랑에 대한 예의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