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쳐가는, │ deux.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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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설이네요. 아버지와 엄마가 이혼하고 아버지와는 따로 떨어져 산 지 어언 두 달. 그 동안 서로 연락도 한 번 안 했는데 설에 같이 시골에 내려 가자고 연락이 왔네요. 차라리 영영 안 만났음 했어요. 싫기도 했지만 감정의 타래들을 건드릴 엄두가 나질 않아서. 그냥 만나지 않고 지냈으면 했는데 내일이면 또 만나게 되네요. 내 안에 이렇게 커다랗고 징그러운 증오가 불타고 있다는 게 싫어요. 누군가를 죽이는 상상이 아무런 아픔 없이 가능하다는 것이, 싫어요. 내가 불쌍해요. 그래서 차라리 마음 놓고 이 분노를 터뜨려서 내가 그렇게 미워하는 그 사람을 상처주고 싶은데 내 안에서 이 더러운 분노들을 다 방출시키고 싶은데 도대체 왜 그게 안 돼는 걸까요? 그 사람은 평생을 주변 사람들에게 잘도 상처를 주면서 살아가는데 나는 왜 한 사람에게 상처주는 것도 이렇게 벌벌 떠는 걸까요. 나에게 준 상처를 되갚아 주는 것도 못 하겠다며 이렇게 착한 척을 하는 걸까요? 착하면 뭐 얼마나 착하다고. 그렇게 착하지도 않으면서. 모진 소리를 하고 싶다가도 그래도 이십 년 동안 열심히 일 한 것이 생각나고 이 집에서 나는 돈 버는 기계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그 등이 생각나고. 망할. 당신이 이 집에서 기계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신이 나를 무참히 짓밟았고 그래서 나는 당신이 증오스러웠고 그래서 당신을 싫어했기 때문이야. 당신이 매일 밤 늦게까지 일하는 걸 나는 알고 있었고 일편 고마운 마음은 들었지만 그런 고맙고 안쓰러운 마음은 하루도 안 가 뒤집어졌어. 당신의 행동으로 인해. 나에 대한. 당신의 아내에 대한. 그리고 당신의 아들에 대한 그 행위들로 인해. 나는 당신이 미워. 증오스러워. 만나고 싶지 않아. 하. 이렇게 말해 버리고 다시는 만나지 않든지 아니면 한 대 맞든지 아니면, 정말 어쩌면 사과를 받든지. 어떻게 되든지 털어버렸으면 좋겠는데. 잘 되지를 않는다. 아무튼 내일은 두 달여 만에 아버지를 만난다. 창자부터 불쾌한 감정이 끓어 오른다. 어떻게 대해야 할 지도 잘 모르겠다. 쌀쌀맞게 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가지가 걸린다. 연민. 딸에게 모진 소리를 듣고 상처받을 그 마음에 대한 연민. 그리고 내 동생. 나만큼 아버지를 증오하지는 않는, 한편으로는 조금은 아버지를 좋아하는 내 동생이 내가 아버지에게 모질게 대하면 자신이 아버지에게 잘 해주고 싶은 그 감정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않을까, 내 눈치를 보며 그 감정을 숨기지나 않을까. 자신의 뜻과는 상관 없이 아버지와 척을 지게 될 그 아이가 불쌍해서. 남자 아이인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배울 것이 많은 아이인데 아버지와 같이 살지 못하고 엄마와 누나라는 드센 여자들 사이에서 사는 그것만도 불쌍해서. 아버지와는 너무 척지지 않았으면 해서. 그래서 더 모진 소리 못 하겠기도 하고. 도대체 사람은 왜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 헤아리는가. 나는 왜 주변의 모든 사람의 감정이 내 감정인 듯 느껴지는가. 아무리 외면해도 나와는 상관 없는 일들이라고 문을 닫아버리려고 해도 되지를 않는다. 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이랑 감정 교류하는 게 어려워져 버렸는데 정작 이럴 때는 제대로 작동하질 않는다. 제발 내 감정 하나만 느껴졌으면 좋겠다. 엄마의 감정 내 동생의 감정 아버지의 감정이 나에게 전해져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머리로만 살았으면 좋겠다. 감정이라는 건 정말이지 고통스러운 느낌이다. 이해라는 건, 공감이라는 건 없애버리고 싶은 기능이다. - 모질어졌으면 좋겠다. 약아졌으면 좋겠어. 나빠졌으면 좋겠다. 득달 같아 졌으면 좋겠다. 사람과 상황을 이용할 줄 알았으면 좋겠어. 아주 가끔씩이라도, 몇 번 만이라도, 머리와 마음이 따로 움직여줬으면 좋겠다. 하고 싶지 않더라도 해야 한다면 할 필요가 있다면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좋은 감정들까지 버리고 싶지는 않지만 어느 한 쪽만 가질 수는 없는 거라면, 차라리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아예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 같은 거 이제는 안 해도 좋으니까 다시 닫아버릴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는 그치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조금씩 열어갔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이제는 감정이 상처 입을 일은 없겠지, 하고. 중학생만 되면, 고등학생만 되면, 대학생만 되면, 어른만 되면, 부모가 이혼만 하면,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힘든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제 좀 괜찮다 싶으면 또 다시 터지고, 조금 수그러든다 싶으면 또 다시 펑. 차라리 닫는 게 나을까. 평생을 이기적으로, 무감각하게 사는 것이 나을까. -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애써 위로하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나를 위로하는 것도 내가 나를 다독이는 것도 내가 나를 치료하는 것도 내가 나를 키우는 것도 지쳐간다. 내가 나에게 이야기한다는 표현, 억지로 쓴다. 자꾸만 '너' 라는 표현을 쓰게 된다. 힘내자, 가 아니라 힘내라, 하나야. 내 잘못이 아니야, 가 아니라 네 잘못이 아니야. 분열되는 기분. 단 한 명이라도 의지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태산 같이 나를 지탱해줄, 힘들면 쓰러질 걱정 없이 기댈 수 있는 존재. - 스스로를 돌보는 일에 지쳐간다. 도대체 이 놈의 마음은 얼마나 더 고쳐주어야 얼마나 더 쓰다듬어야 얼마나 더 치료해야 피가 멈출는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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