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눈.   deux.
  hit : 2409 , 2012-11-08 21:37 (목)



남자친구에게 미안하다.
내가 지금 행복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니 이게 무슨 병신같은 느낌이지? 





그런데 이걸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나는 그냥 미안하다.
한 없이 미안하다.
비슷한 감정을 꼽자면
어린 시절에 엄마랑 동생한테 느꼈던 미안함이랑 비슷한 것 같다.
미안해.
나만 참으면 되는데 
괜히 사실을 이야기해서 집안을 쑥대밭을 만들어서 미안해.


이런 감정? 
사실은 이게 말도 안 돼는 감정이란 걸 아는데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차라리 눈을 감고 싶다.
또 다른 내가 눈을 너무 또렷하게 뜨고 있어도 힘든 것 같다.
이 눈을 감고 싶다.
나도 내 힘든 만큼 힘들고 싶은데
또 하나의 눈은 내가 그렇게 힘들었을 때
상처받을 주변 사람들을 바라본다.
전체 상황을 조명한다.
그러면 나는 그 눈이 비춘 미래를 보면서
마음껏 힘들어하지를 못한다.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내가 막는 상황이다.

도대체 이 눈은 왜 이렇게 
정신이 말짱한 거야.
응? 
좀 감겨라.
나도 좀 안하무인이 돼 보자.
다른 사람 신경 안 쓰고 그냥 마음껏 좀 힘들어보자.
상처도 좀 줘 보고
정신 없이 투정도 부려보고.
미운만큼 미워도 해 보고.



어제 잠깐 이 눈이 감기긴 했다.
엄마랑 싸웠는데 
동생 앞에서 엉엉 울었다.
그 눈이 감긴 것이다.
그 눈을 좀 감고 싶은데.
그 눈이 좀 감기면 내가 감정 표현을 하고
투정도 부리고 어리광도 부리고
화도 내고 울기도 하고
그러면서 좀 표출을 할 것 같은데.
망할 그 또 다른 눈이 나를 너무 
너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바라보고 있다.

이 눈을 감을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상담 선생님한테 좀 물어볼까? 
이 눈이 뭔지.
나는 왜 이 눈이 이렇게 말똥말똥하게 켜져 있는 건지.
감을 수는 없는 지.


이거다.
이건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이런 결론조차도 
그 눈이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내린 게 아니야.
그 눈이 내린 거야.
그 눈이 나를 보고 있다.
소름 끼친다.

그 눈은 나인가? 
또 다른 나인가? 
너는 누구니? 
누구길래 그렇게 똑똑하고 철저하니? 
너는 완벽주의자일 거야.

그래서 내가 힘들지 못하게
무너지지 못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못하게
막고 있는 거야.
그런데 너는 왜 주변은 잘 보면서
나는 잘 못 보니? 
주변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내가 힘든 걸 
너는 못 보니? 

너는 누구니? 
너는 나니? 
아니면 내가 아니니? 
응? 




.
.



나면 나랑 같이 살자.
그냥 내 안으로 들어와.
그래서 우리
'하나'가 되어 살자.
나는 너랑 둘이 사는 게
너무 힘들어.
내가 들어갈까? 
네가 들어올래? 




.
.



그래
네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 안다.
네가 나를 그 더러운 상황 속에서 살아남게 해주었다.
안다.
근데
이제 됐다.
이제 안 그래도 된다.
이제 아무도 나를 안 괴롭힌다.
이제 내 주변에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만 있다.
나를 공격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편하게 눈 감아라.
내가 안아줄게.
수고했다.
우리 이제 좀 행복하게 살자.

티아레  12.11.09 이글의 답글달기

프로이드에 의하면 그 눈은 '초자아(superego)'겠지요.. 융은 그것도 콤플렉스의 일종이라고 말할 거구요. 그 콤플렉스 혹은 초자아는 하나양의 자기보호 본능에 의해 정상적이지 못했던 하나양의 부모 역할을 해왔을 거예요.

자아가 제대로 발달하거나 제 기능을 못했을 때부터 초자아가 상대적으로 더 큰 역할을 해야만 했을 거고, 그로 인해 통제, 감시, 외부에 대한 경계 등이 주된 기능이었을 거예요. 기본적인 목적은 "자기보호"지요. 타인의 공격이나 비난, 타인과의 갈등, 불화 등 이러한 긴장과 공포 상황으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기위해 '갈등회피기제'가 많이 사용되었을 거예요.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도, 우는 것도 소용이 없고, 저항도 불가능하고, 하소연할 상대도, 구해주는 이도 없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폭력과 불행을 벗어날 길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양의 초자아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그나마 더이상의 갈등과 불화를 야기할 상황을 피하는 편을 택하는 거였겠지요.

자신을 희생하는 편이 가족의 불화, 타인과의 갈등을 야기하는 것보다 자아에게 더 안전하게 느껴졌던 거죠. 그럴 필요가 없어진 지금도 하나양의 초자아는 여전히 자신을 지키기위해 경계를 늦추지 못하는 거구요. 아직은 안심할 수가 없는 거죠. 벗어날 희망도 오래전에 무참히 꺽였을 거고, 너무 오랫동안 벌어진 일이었구요.

죽도록 울며 간청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어렸을 때 왜 그런 희망을 품지 않았겠어요. 소용이 없었잖아요. 엄마가 혹은 동생이 구해주지 않을까, 왜 그런 소망이 없었겠어요.. 그런 모든 희망이 다 부질없다는 걸 거듭 거듭 확인하면서, 무너지고, 길들여지면서 더이상 울지 않게 되었겠지요.

맞아요. 자신의 초자아를 따뜻하게 안아주세요. 수고했다고. 그런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랬다해도 억울함을 풀어준 누군가 있었다면, 그 상황에서 즉시 구해준 누군가가 있었다면 하나양의 초자아는 그토록 오랫동안 초긴장 상태로 경계 태세를 유지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자아도 건강하게 발달하여 갈등상황이나 갈등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자신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키는 선택보다는 자신과 타인의 이해가 바람직하게 균형을 이루는 선택을 하고자 했을 거구요.

자신이 타인에게 소중하게 대우받고 존중받는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초자아는 필요한 선에서 적절한 정도의 개입만을 하고, 대신 강해진 자아가 자유롭게 주된 역할을 하거든요.

하나양, 이제 그런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서 좋은 경험 많이 하리라 믿어요. 놀랍게도 하나양의 자아는 지금도 정말 건강하고 강하답니다. 앞으로 훨씬 더 멋진 사람이 될 거예요^^




李하나  12.11.09 이글의 답글달기

네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이미 오래 전부터 느껴왔었던 건데. 닉네임을 '하나'로 바꿨을 즈음, 부터. 내가 둘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 둘이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었지요.
초자아가 아직도 경계를 늦추지 못하고 있어서 힘든 것 같아요. 이제는 조금은 긴장을 늦출 수 있게 서로 도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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