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라지게 똑똑하다.   deux.
  hit : 2614 , 2012-11-18 10:45 (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벌써부터 가동되는 머리가
오늘은 없애버리고 싶을 정도로 짜증난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직장 동료의 전화를 받으며 시작된 아침.
내가 또 뭔 실수를 했나보다.
그 사람이 내가 얼마나 답답할까,
부터 시작해서
나는 왜 남이 나를 답답해하는 것을 걱정할까,
나는 왜 항상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할까,
나는 왜 항상 내가 희생하고 마는 걸까,
라는 생각까지.

남자친구의 카톡을 보며
그동안 남자친구와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밉다고,
그런데도 나는 좋다고,
그러니까 내가 병신이라며

온갖 생각을 한다.



.
.



그리고 내가 오빠가 불편한 이유에 대해서까지
생각이 닿는다.
불편하고 불편하다.
편하지 않다.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다.
이유를 모르겠으면 그냥 불편해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꿈에서는 또 오빠를 찾는다.
나도 나를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나는 내 감정 가는 대로 하고 싶은데
그러면 오빠를 상처주게 될까봐 무섭다.
또 다른 나는 그런 미래를 나에게 또 보여준다.

나는 
졸라 똑똑하네 시발년,
이라며 누워서 괴로워한다.




.
.


짜증난다.
다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며
그저 지금의 감정에 충실했으면 좋겠다.





우라지게 똑똑하며
지랄맞게 겁이 많다.




.
.



분석의 대가.
통찰과 경고의 전문가.
민감도 최대.




.
.



자아와 초자아의 줄다리기.
이런 걸로 고민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편으로는 그냥 이것에 집중하고 싶기도 하다.
일생 동안 몇 번 쯤은 이런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남자친구가 마음에 걸린다.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나는 좀 더 기분 좋게 남자친구를 만날 수 있고
조금 더 사랑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의 그런 사랑을 받지 못할 그가 불쌍하다.
차라리 남자친구를 사귀지 말 걸 그랬다.
참으로 유감이다.




하지만 이것도 다 완벽을 추구하는 나의 성격 때문이다.
내가 가 닿을 수 있는 최대 수준의 행복을 추구하는
완벽 주의 성격.
모든 방해 요소를 제거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를 항상적으로 추구하는 성격.

그러니까 나는 지금
나의 최대의 사랑에 도달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것이고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과제에 직면해 있어
괴로워하는 것이다.




.
.



늘 그렇지만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잃어야 한다.


나를 얻을 것인가
너를 얻을 것인가.




.
.



한 가지 궁금한 건
내가 나를 얻으려면
정말로 너를 잃어야 하는 걸까? 



.
.



내가 원하는 것은
한 없이 망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망가지고 싶다.
형편없는 인간이 되고 싶다.
비인간적인 인간이 되고 싶다.
내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모조리 빼내는 시간을 갖고 싶다.
그 시간 동안 네가 나를 견뎌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내게는 없다.

그 시간 동안의 나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나의 가족과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한 명의 친구 뿐이다.
너는 나를 안 지 이제 1년도 되지 않았다.
우리가 만나게 된 지는 이제 석 달이 되었다.

네가 나를 감당하기에는 한 없이 짧은 시간이다.





미안하다.
너는 나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지금 나는 너를 신뢰할 수 없다.



.
.



미안할 일은 아니다.
네가 나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으니까.
너는 그냥 나를 감당할 수 있을 만한 남자가 아닌 것이다.




.
.



내가 너와의 관계를 지나치게 
깊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냥 인생의 한 시점을 같이 보내는 
가장 가까운 친구,
쯤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내가 너와의 관계에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기대했고
이상적이었고
너무나 많이 너에게 의존했다.


너는 그냥
나의 남자친구이다.
나와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도 아니며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나의 인생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너는 그냥 나를 좋아하고
나는 그냥 너를 좋아하고
우리는 그냥 서로를 좋아하고
그런 감정에 기대
몇 번이고 계속해서 만나고 있는 사이일 뿐.

그리 대단한 사이는 아닌 것이다.


우리의 감정은 소중하지만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나의 일부이다.
전부는 아니다.


전부가 되기에는
너는 나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적다.




나는 너를
믿지 못한다.



.
.


우리 그냥
여자친구와 남자친구 사이로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자.


나는 너와 나의 모든 것을 나누려는 
기대를 버릴 것이고
너에게 나의 모든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필요한 만큼만
내가 지금 이 순간 보여줄 수 있는 만큼만
네가 궁금하다면 
내가 말해줄 수 있는 만큼만.
딱 그 정도만.
무리하지 않으며
다만 진심으로
너를 생각하며.


그 정도면 될 것 같다.
그게 너와 나이다.

    12/11/19
   나를 알아가는 시간 12/11/19
   더럽다. [3] 12/11/18
-  우라지게 똑똑하다.
    12/11/18
   죽여줄게 12/11/16
   나와 나의 줄다리기 12/11/16